[한겨레] 무서록(無書錄)-순서 없이 쓴 글. 제목에서부터 수필 장르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수필’이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뜻이니 제목으로나 내용으로나 그야말로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수필집이다.
이곳 저곳 펼치는 대로 자연과 문학, 삶에 관한 놀라운 통찰력이 담긴 글들이 뛰어 나온다.
아름답다. 정갈하다. 섬세하다. 자연스럽게 읽혀지는 글들은 산과 돌, 바다, 가을꽃, 자연과 문헌, 수목 등을 더듬으며 자연을 통찰하고 상상하는 작가의 능력을 한껏 과시한다.
실제로 저자인 상허 이태준 님은 한국 근대문학의 손꼽히는 명문장가다.
‘시에는 정지용, 소설에는 이태준’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지난 1930년대 우리 문단을 주름잡던 소설가였다. 단지 그가 월북 작가, 즉 해방 뒤 북한 체제를 선택한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 저간의 현실이었다. <무서록> 역시 1941년에 출판되었으나 한동안 사장되었다.
<무서록>에는 탁월한 명문장가로서 이태준 님의 진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만큼 소재와 대상의 속성을 곱씹고 드러내는 작가의 자세와 솜씨가 빼어나다.
물론, 책을 읽다가 보면 30년대 글 특유의 흔적이 곳곳에 나와 거슬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능인자안이라든지 어별, 상선약수 등 한시와 한자 문구 등. 하지만 이는 당시 글의 일반적인 경향일 뿐, 그의 수필을 낮게 볼 이유는 되지 못한다.
<무서록>을 읽다가 보면 글과 글쓰기만이 아니라 글읽기에 대한 상허 나름의 뚜렷한 견해를 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소설의 맛’이란 제목의 글에서는 주인공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보다는 읽어가면서 맛보고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인생을 소설로 표현해내는 작가의 솜씨를 흠뻑 맛보는 것이 소설 읽기의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다. 그가 셍텍쥐베리의 소설 <야간 비행>에 대해 평한 대목은 스스로 제시한 주장을 잘 살려낸다.
다음은 <무서록>에서 내가 접어 놓은 한 군데.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허병두/ 서울 숭문고 교사,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 대표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