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의 여름 세종 때 압록강 상류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함길도 경성·길주·단천·북청 등에서 빈농 2200 호를 이주시키기로 했다. '만약 그 도(道) 안에서 이주시킬 수 있는 민호(民戶)가 그렇게 못 된다면'의 대안도 마련했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충청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 등의 도에서 자원하여 이주할 사람을 모집하되, 양민(良民)이라면 그 곳의 토관직을 주어 포상하고, 향리(鄕吏)나 역리(驛吏)라면 영구히 그의 이역(吏役)을 해제하여 주며, 노비(奴婢)라면 영구히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여 주어야 합니다'라고 세종실록에 자세히 적혀있다.
사민(徙民)정책은 그렇게 메리트를 줘야 가능했던 것이다. 905년 궁예가 송악에서 철원으로 환도가 가능했던 것은 사민을 적절히 활용한 인구정책 수완 때문일지 모른다. 그때 철원으로 간 청주인 1000 호의 규모를 '슬픈 궁예'의 저자 이재범은 통일신라 때 토지문서 신라장적(新羅帳籍)까지 들춰내 '1만 명 이상'이라고 계산해 놓고 있다. 장정만 2000∼4000 명, 병농(兵農)이 따로 없던 당시로는 한 국가가 독립할만한 병력을 소유한 인구 대이동이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철원까지 가게 했는지는 아직까지 사학자들도 입을 다물고 있다. 다만 김헌창의 난을 빌미로 신라가 백제성향의 청주를 무참히 토벌한 사건은 예로 들만하다. 궁예의 수완이 그 반(反)신라 감정을 폭발시켰을 지는 모른다. 그렇더라도 사민 메리트는 있어야 한다. 상상력을 덧붙인다면 드넓은 철원벌의 풍요한 지주, 그보다 태봉국의 왕도선민, 그 수도선민이 매력 있었을지 모른다.
그 후 1100년, 그 왕도에서는 옛 태봉국을 경기도에 '귀부'시키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아마 옛 수도선민 메리트라고는 단 한 톨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죄일 것이다. 농산물 수입개방은 아랑곳없이 철원평야는 요즘 한껏 짙푸르러지고 있다. 그 오대미 대풍 예고마저 황성옛터 여름을 속절없이 슬퍼지게 하는 걸까.
함광복 논설실장 hamlit@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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