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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종현
2006/7/16(일)
비운의 개혁가 박제가 선생님  

朴齊家 1750∼1805(영조 26∼순조 5)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위항도인(葦杭道人). 본관은 밀양(密陽). 소년시절부터 시·서·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쳐 19세를 전후하여 박지원(朴趾源) 등 북학파들과 교유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이덕무(李德懋)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청(淸)나라까지 문명을 떨쳤다.

 

78년에는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한편 정조는 서얼들의 누적된 불만을 무마시키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77년 서얼허통절목을 발표하고, 79년에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하여 박제가를 비롯한 서얼 출신 학자들을 검서관으로 임명하였다. 박제가는 이후 13년간 규장각 내·외직에 근무하였고, 86년에는 <구폐책(救弊策)>으로서 신분적인 차별 타파와 상공업 장려를 주장하였다. 90년 두번째 연행(燕行)길에 오르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서 왕명을 받고 원자(元子;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연경에 파견되었다. 1801년(순조 1) 네번째 연행길에서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의 흉서사건에 혐의가 있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1805년 풀려났으나 곧 죽었다. 저서로는 《북학의(北學議)》 《정유집》 《정유시고》 《명농초고(明農草藁)》 등이 있다.

‘어릴 때부터 읽은 책은 반드시 세번씩 베껴 썼고, 변소에 가면 허공에 글쓰기를 연습하거나 모래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박제가는 학자적 소양이 풍부했으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서얼 출신의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년. 그래서 그는 사회적 소외감 속에서 내적 갈등과 싸우며 살아야 했다.자아와 이상의 괴리를 딛고 개혁을 외친 문인이며, 화가·경제학자인 박제가의 지난한 삶을 살핀다.

 박제가(朴齊家)는 역사적 전환기에 치열한 삶을 산 뛰어난 문인이었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주류를 거슬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용감한 비주류였다. 그는 나라 살림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물을 도입할 것 등 중상주의적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대부분 비주류의 경우가 그렇듯 그의 주장은 주류의 ‘무관심’에 묻혀버렸다.

그 과정에서 겪는 좌절과 울분 그리고 정신적 성숙 등이 그의 문학작품에 고스란히 표현돼 있다. 문학은 삶의 전체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한다. 문학작품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삶을 진실하게 반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시대를 뜨겁게 살았고, 안타깝게 마감한 박제가의 작품은 시대를 넘어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주는 감동이 있다.

박제가는 1750년 11월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밀양 박씨이며 아버지는 부승지(副承旨)를 지낸 박평(朴坪·1700∼1760)이었다. 박평에게는 이미 제도(齊道)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전주 이씨(1721∼1773)와 사이에 제가를 낳았다. 제가는 자(字)를 재선(在先)·차수(次修)·수기(修其), 호(號)를 초정(楚亭)·정유(貞 )·위항(葦杭)이라 했다.

그의 유년기에 대해 ‘어릴 때부터 글을 좋아해 읽은 책은 반드시 세번씩 베껴 썼고, 입에는 늘 붓을 물고 있었다. 변소에 가면 그 옆 모래에 그림을 그렸고, 앉아서는 허공에 글쓰기를 연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스스로도 ‘내가 처음 글을 배운 것은 막 젖먹던 때였지’(我初學書尙哺乳<七夕篇>)라는 시구를 남겼다.

그는 ‘열한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묵동 집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필동으로, 거기서 묵동으로 갔다가 또 필동으로 전전하며 간신히 연명해 돌이켜 생각하기에도 끔찍스럽다’고 소년시절을 술회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혼자 되신 후로는 드실 음식이 없었고, 해진 솜옷이나마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신 채 새벽닭이 울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하셨다’고 애달퍼했다. 하지만 ‘아들이 사귀는 이가 종종 어른과 손윗사람 등 이름있는 분들이었으므로 아들을 위해서라면 있는 힘을 다해 잘 대접했다. 그래서 아들만 보고는 그의 가난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적었다.

그가 17세 되던 해 혼인한 덕수(德水) 이씨(李氏)는 충무공의 5대손인 이관상(李觀祥)의 서녀(庶女)였다. 이렇게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바로 이때 그는 자신의 문예활동에 큰 영향을 준 박지원과 이덕무·유득공 등을 만났다. 그는 연암이 당대의 명문장가라는 말을 듣고 탑골 북쪽으로 찾아간다.

이덕무를 통해 이미 박제가를 알고 있던 연암은 제가보다 열세살 손위였으나 옷매무새도 가다듬지 않고 뛰어나와 옛친구처럼 손을 잡고 자기 글을 모두 꺼내 읽어주었고, 몸소 밥을 지어주며 오래 살라고 술까지 부어주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그는 탑골 근처에 살던 이덕무와 유득공·이서구·서상수·유련 등과 함께 어울리며 스스로의 말처럼 ‘한번 가면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돌아올 줄 모르는’ 사이가 됐다. 그가 얼마나 이들을 그리워하고 소중히 생각했는가는 ‘신혼 초야를 지내자마자 장인의 말을 빌려 타고 처가에서 빠져나와 이들과 술을 마셨다’는 일화라든지 ‘형제라도 같은 기질 아닐 수 있고/부부라도 한 방을 쓰지 않을 수 있지만//사람은 하루라도 벗이 없으면/마치 좌우 손을 잃은 것 같네’라고 읊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하루라도 벗이 없으면 양손을 잃은 것 같네’

이덕무나 유득공과는 신분적 동질성과 시(詩)·서(書)·화(畵) 전반에 걸친 공통적 예술취향으로 평생의 지기(知己)가 된다. 박제가는 자신의 시집에서 호를 초정으로 삼은 연유를 밝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초사”(楚辭) 읽기를 좋아해 ‘초정’(楚亭)으로 호를 삼는다. 그 시는 대개 깊은 근심과 느꺼워 탄식하는 소리가 많다’고 했다.


나라를 위해 고심하며 울분을 글로 삭인 “이소”(離騷)를 유독 즐겨 읽은 것은 그가 평탄하지 못한 삶 속에서 겪는 갈등과 고뇌를 문학을 통해 해소하려 함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 중 특히 이덕무는 박제가보다 아홉살 위였으나 의기투합하는 사우(師友)로서 가장 돈독한 관계였다. 이덕무는 박제가에 대해 백동수의 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수줍고 내성적이어서 남에게는 별로 말이 없었는데 내게는 말을 잘 했다. 비바람 들이치는 집에서 등불을 밝히고 있는 속 그대로 조금도 숨김없이 이야기하다 격해지면 서로 슬퍼하고, 좋아지면 서로 기뻐하면서 조용히 바라보고 웃었다’고 썼다.

박제가가 이덕무와 함께 지내면서 지은 시 중에는 ‘날 개자 빗물 졸졸 흐르고/바위 틈엔 물소리 쉬지 않고 울려오네//빈 산은 무엇을 소유하리오/구름이 솟아본들 그저 그렇지//시든 버들은 먼지 뒤집어쓰기 쉽고/고고한 소나무는 먼저 그늘 보내는 법//붉은 누각에서 여름날 보내면서/한 선비가 외로운 매미 보고 느꺼워하네’라고 읊은 것이 있다. 재주가 있어도 세상에 쉽게 쓰이지 못하는 자신들의 외로운 심경을 담아낸 시다.

그는 이덕무를 중심으로 문학동인 활동을 하는 한편 박지원을 통해 홍대용을 알게 되면서 선진적 문명의식을 키워나간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의 문학활동은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과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두 책으로 일단 마무리된다. “백탑청연집”은 현재 그가 쓴 서문만 남아 있으며 “한객건연집”은 유금(柳琴)이 청나라에서 엮어냈다.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 네사람은 연경(燕京·베이징) 문단에 사가(四家)라고 소개되면서 중국 문인들의 높은 찬사와 인정을 받았다. 이들의 시는 우리의 현실감각으로 생활감정을 다루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자유분방하나 감정적 색조는 어두운 시 작품들
박제가가 이 시기에 쓴 시들은 감성적이고 감각적이며 때로는 자유분방하다. 활기차고 참신한 느낌이 넘쳐나면서도 감정적인 색조는 다소 어둡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난 뒤의 곤고함과, 서얼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인한 사회적 소외감이나 내적 갈등이 원인이었으리라.

물론 타고난 재예와 부지런한 글공부, 왕성한 창작욕구와 젊은 패기 그리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과 함께 지냄으로써 개인적 울분이나 한(恨)을 삭일 수 있었기에 이러한 요소들이 직접 시에 표면화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갈고 닦은 단아한 기상이 돋보인다.

친교가 있던 인물들에 대한 그리움을 읊거나 서울 근교를 유람하며 자연경관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들도 많다. 임호상의 집에서 썼다는 시에는 ‘바람이 잔잔하니 향은 저 혼자 맑게 날고/단정히 앉아 눈 감으니 세속 인연 드물어라//가을소리 태반은 시 속으로 들어오고/밤빛은 괜시리 술 속으로 돌아드네//가물가물 푸른 등불 작은 방을 감싸안고/팔랑팔랑 지는 잎은 텅 빈 사립에 날아든다//바로 이때 개 한마리 표범처럼 짖어대는데/가지 끝에 걸린 별빛 다투어 옷깃 적시누나’라는 것이 있다. 고요한 가을밤 술잔을 앞에 두고 천지의 변화를 가까이에서 포착하는 산뜻하고 청신한 감각이 내비친다.

연표
1750 영조 26년 1세 서울 출생.
1760 영조 36년 11세 부친 坪 타계.
1767 영조 43년 18세 덕수 이씨와 혼인.
1768 영조 44년 19세 박지원과 처음 만남.
1778 정조 2년 29세 이덕무와 함께 중국에 사신으로 감. “북학의” 저술
1779 정조 3년 30세 이덕무·유득공·徐理修 등과 초대 검서관으로 선발됨.
1786 정조 10년 37세 검서관 그만둠.
1790 정조 14년 41세 두번째 중국행.
1792 정조 16년 43세 부여 현감 제수.
1800 정조 24년 51세 정신적 지주 정조 승하.
1801 순조 1년 52세 유득공과 함께 중국행. 신유사옥과 연루돼
함경도 경성부로 유배됨.
1805 순조 5년 56세 유배생활에서 해배됨. 타계.



 

선진화된 중국 문물을 직접 경험하고자 했던 열망은 그가 스물아홉살 되던 해에 이루어진다. 채제공(蔡濟恭)의 배려로 이덕무와 함께 사행(使行)길에 나서게 됐던 것이다. 당시는 청(淸) 건륭(乾隆) 연간으로 문화사업이 한창이었으므로 석학들이 연경에 모여 있어 이들 중국 학자나 문인들과 자연스럽게 친교할 수 있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겪던 사회적 구속은 그로 하여금 드넓은 문명사회에 더욱 심취하게 했을 터다.

중국문화를 두루 열람하고 돌아온 뒤 그는 “북학의”(北學議) 내·외편을 완성했다. ‘자라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기술을 좋아했다’는 그의 말처럼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던 경제에 대한 의론(議論)과 중국에서 체험한 문물을 기록했다. 청을 오랑캐라 여기던 고루한 관습에서 벗어나고 빈곤에 처한 민생(民生)을 구제하자는 개혁의지가 구체화됐다.

이러한 뜻은 ‘우물 위에 도르래 매달고/바퀴와 덮개 만들어 보세//양쪽에 두 줄로 밧줄 내리면/그 힘이 두 배로 늘어나리라’하고 읊은 시나‘ … 육지물건 중국과 유통 못하고/바다장수 일본에 가지 못하면//들판 한가운데의 우물 같아서/퍼내지 않으면 저절로 말라버리지 … ’라는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民生 구제의 개혁의지 구체화

이듬해 정조(正祖)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서얼 출신 학자들을 검서관으로 뽑았다. 그에게는 검서관으로서의 7년간이 실무 외에도 왕실의 서적을 마음껏 읽고 관료문인들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이 시기에 쓴 시들은 대체로 후박하고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 향 사르면서 거문고 타는 일을/혼자서 즐긴다면 참 말할 바도 못되지//날씨는 찬데 서너 사람 모여들고/날 저물자마자 생각 서로 딱 맞아//산 속 사립엔 촛불 그림자 흩어지고/눈 덮인 집에선 차 달이는 소리//매화는 가지마다 싹을 막 토해냈고/앉은 자리마다 맑은 기운 감돌아//거문고 튕겨가며 노래도 이미 부른 터라/동이술을 마시면서 웃고 서로 위로하네//해학은 천기를 드러내주는 것이니/진솔한 성품 거리낄 것 없어라.’

마음이 통하는 벗과 세상 일을 주고받으며 밤새도록 함께 하는 즐거움은 얼마나 클까. 더구나 피끓는 젊음이요, 암울한 세상인 것을…. 시주(詩酒·시와 술)를 주고받으며 천진한 심성을 드러내고 인위적 수식이나 허위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순연한 상황을 노래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41세 되던 해와 그 이듬해 다시 연행(燕行·중국에 감)하게 된다. 그는 중국의 석학들, 특히 당시로서는 꺼리던 안남·만주·몽고인들과도 두터운 교제를 가졌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분방함은 주위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정조가 박제가를 아낀다는 사실과 박제가 자신의 지나치게 날카로우며 직선적인 성격 등이 어우러져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 같다.

그는 연행 몇년 후 심한 눈병을 앓고 나서 더이상 글을 베껴 쓰거나 교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지방관을 자청해 부여현감이 된다. 그는 농민생활의 고충을 직접 보고 들은 대로 보고하면서 놀고 먹는 양반들을 도태시킬 것, 중국으로부터 기계와 기구를 배워 받아들일 것, 곡식을 적절한 방법으로 저장할 것 등을 상소했다.


이 시기에 그는 연행(燕行)길의 새로운 풍물과 여행 노정에 관련된 시들을 쓴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회고하거나 청나라에서 함께 지내던 문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읊기도 하고 ‘발로 밟는 국수기계 쩔꺽거리자/국수가 그 속에서 펄펄 나오네//주인양반은 편안히 앉아/맷돌 가는 나귀만 움직이라 소리치네’처럼 문명화한 선진 사회를 동경하기도 한다. 대체로 안온하고 담담한 시들이 주류를 이루면서도 현실에 대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개혁의 의지조차 허망하다는 인식이 느껴지기도 한다.

중년의 나이에 들어섰다고 해서 천성적으로 날카로운 성격이나 기벽(奇癖)이 누그러진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시에서는 이 시기부터 현실의 질곡과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탈속(脫俗)한 세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욕망이 함께 드러난다. 큰아들과 주고받은 시에는 자연 속에 흔연히 어우러질 동시적(童詩的)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


‘밭 갈고 우물 파 자연 속에 머무르면서/이 속에서 시 읊으며 홀로 천년 지내리라//앙증맞은 제비란 놈 재잘재잘 말도 많고/깜찍한 비둘기는 오디 먹고 취해 자네//누런 그루터기 아래에는 거문고 타는 사람들/나도 장차 술 사들고 구름가에 노닐고파//매서운 바람, 신선들 뗏목에 한번 들이치니/오악의 진면목이 내 팔 뒤에 매달렸네’

그가 51세 되던 해 정조가 승하했다. 더이상 그를 특별히 대우하거나 배려할 이를 잃게 됐음을 의미한다. 박제가가 사용하던 ‘정유’라는 호는 정조가 그의 집 소나무에 ‘애어송’(愛御松)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데서 비롯했다.

‘태어나서 밥 먹은지 오십년인데/세상살이 모래맛 같아 삶아도 묽지 않네//누대 앞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구었지만/푸른 빛 변치 않는 것은 오직 정유송’이라는 시를 통해 그의 울적한 심사를 짐작할 수 있다. 사가(四家)를 후원하던 정조가 없는 상황에서 이미 이덕무는 세상을 떠난 뒤였고, 유득공은 급격히 몰락했으며, 이서구마저 실각한 상황이었다.

그는 신유박해와 시(時)·벽(僻)파의 대립 속에서 윤가기와 사돈이라는 이유로 연루돼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가게 된다. 이 시기에는 유배행로에서 본 풍경과 풍물에 자신의 비감함을 부쳐 읊었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적 안목으로 나그네의 정회를 엮어내기도 한다.

‘훌륭한 관리는 다른 재주 아니라/먼저 돈 생각부터 끊어야 하네//문관의 책임이란 더더욱 각별해서/온 땅 백성을 함께 가르쳐 길러내는 것’이라든지 ‘지방벼슬에는 후하고 박한 자리가 있어/후한 자리는 유난히도 자주 바뀌지//관청의 살림조차 제집 것인 양/공공의 곡식을 사채로 바꿔놓네’에서처럼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그가 직접 보고 들은 현실을 고통받는 이들의 입장에서 사실적으로 써내려갔다.

‘훌륭한 관리는 돈 생각부터 끊어야 하네’

한편 말년에 쓴 시에서는 다소 체념적이고 자탄적인 심정을 토로한다. 문장 수련을 통해 이름을 얻고 나아가 자신의 뜻을 온전히 실현함으로써 소외된 신분과 고단한 삶을 극복하고자 했던 그였다. 그러나 갈등이 심화되고 반복될수록 자아와 이상의 괴리를 인식할수록 위축됐던 듯하다.

‘좋은 농사는 천년간 이어온 뜻/길게 한숨 쉬며 빈풍장을 읊어보네//남을 따라 문장에 뜻을 두었고/때때로 번화한 거리도 밟아보았지//이 몸은 남의 모욕도 달게 받았고/지혜 없어 주머니 속만 털어보았네//우스워라, 내 스스로 졸렬하게 살아온 것/말똥 안고 가는 말똥구리와 마찬가질세’


이 시에서는 노력해도 소용없음과 재주없음에 대한 참담한 자괴감이 그려져 있다.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3경(經)을 주석하던 약 4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서울로 돌아온 그는 1805년 4월25일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스스로를 가리켜 ‘영화도 굴욕도 없는 처지/밭 갈고 곡식 심을 수도 없는 신세’라고 한 것이나 ‘아아, 풍류도 그쳤고 아름다운 말도 끊어졌으며, 덕을 살피고 학문을 하는 것도 이제는 다 허무해졌다’고 쓴 글은 안팎의 괴리를 절감했던 한 작가의 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제가는 사회의 다양한 변혁을 직접 체험했다. 보다 나은 삶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고 절실한 문제들에 대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지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합리적이지 못한 사회제도나 문명적이지 않은 현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감정의 유출을 유보하고 내면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심했다.

박제가에게는 행장(行狀·일대기)이나 묘비명이 남아 있지 않으며 문집도 오랫동안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지적 노력은 삶의 궤적을 따라 1천7백여수에 달하는 문학작품으로 지금의 우리와 함께한다. 그는 철저한 작가의식을 가지고 문학세계를 구축해 우리 문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는 한편, 논리적 시론가(詩論家)로서, 진보적 의론가(議論家)로서의 면모를 아울러 지녔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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