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적을 잃은 철원 사람들

마을 전체가 미상번지로 기록돼

정춘근 시인 jck452@hanmail.net

호적은 있는데 호주의 출생지를 기록한 본적(本籍)이 없다면 사람들은 쓴웃음을 지을 것이다. 그것도 한 두 집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전부가 본적을 알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개의 경우는 오지이거나 낙후된 지역이라고 단정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수복지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철원지역이다. 철원사람들의 호적에는 본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미상 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본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런 기현상이 벌어진 것은 철원에 실향민들이 모여들면서부터이다. 한국전쟁 참화로 풀 한 뿌리 온전히 남아 있지 않던 지역에 호적이 있을 리 없어 주민 신고를 받아 호적을 만들었다. 호적 신고 꺼린 실향민들 호적제도 자체의 수많은 모순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에서 받는 부적절한 대우에 접하는 사람들로서는 모순보다 앞선 억울함이 있다. 당시 목숨을 걸고 지뢰 미확인 벌판을 개간하기에 바쁜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가 호적을 신고할 여유가 없었고 서북인 차별 대우를 당한 설움이 뿌리깊었던 실향민들이 고향을 밝히는 것을 꺼려 호적 신고를 피했다. 궁여지책으로 마을 이장과 반장이 임의로 철원군에 사는 거주지를 본적으로 정하고 미상 번지로 등재하여 마을 사람들 거의 전부가 미상 번지 본적을 갖게 되었다. 실향민들은 본적이 미상 번지로 되어 있어도 생활에 지장이 없고, 그 자식들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로 생각하면서 통일 후 귀향만 기다리고 있었다. 실향민 자식들 북쪽 가족상봉 근거 서류 없어 1.4후퇴 당시 가족들에게 삼일 후에 집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할 정도로 일시적 피난으로 생각했었던 실향민들이 분단이 장기화되면서 사고로 사망하거나 병사하자 그 자식들은 부모 고향 지명만 알고 있을 뿐 정확한 주소를 모르고 살고 있다. 막상 통일이 되어도 실향민 자식들은 부모의 고향을 찾아가거나 가족 상봉을 할 수 있는 근거 서류가 없다는 또 다른 아픔이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 이 땅에는 인도적이라는 이름으로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다루어지지만 남북한 당사자들의 시각차이가 크다는 생각이다. 단적인 예로 6.15 남북 정상 회담 이후 이벤트 형식으로 이산 가족 상봉이 있었다. 남측에서는 추첨을 통한 순수한 이산 가족인 반면 북측은 당에 공헌도를 감안한 보상 형식으로 선정되었다는 의심을 갖게 할 뿐 아니라 감격적인 상봉 현장에서 특정인 만세를 연호하던 모습들은 우리의 현실적 극복과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 평화통일 힘들다고 포기할 수 없어 더 큰 문제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올해를 전쟁의 해라고 협박성 선언을 할 정도로 무력을 앞세우는 국제적 환경 또한 평화 통일 염원과는 암담한 거리감이 있다. 피해자도 아닌 가해자 측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몰염치한 국제적 환경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앞으로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힘을 기르거나 힘있는 자들이 제풀에 꺾이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우리나라 수도 심장부에 아파트를 세우겠다는 생각 앞에서 통일은 당대에서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대내외적인 여건이 불리하다고 평화 통일을 과업을 포기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국민들 사이에 번지는 통일 논의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논의의 중심에 인도적인 이산가족 상봉을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추진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망령처럼 미상 번지를 떠도는 실향민들의 본적을 다시 찾는 국가적 시책이 필요하다. 당대에 통일이 되지 않아도 후손들이 부모 고향을 찾아갈 수 있는 지도 같은 호적을 정리해 주어야 한다. 지금 이 땅에는 분단 극복의 명분으로 남북간의 경제교류, 민간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실향 이산의 아픔을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2002년 01월 08일 정춘근 시인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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