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각 이 사람에게 관심을(1)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최성각 참여인물
2005/02/12 22:29
http://blog.naver.com/tnt62sik/120010178718
첫 수업시간이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한다며 칠판에 주소와 삐삐번호, PC통신 아이디 ‘ikik’를 적어놓았다. 그리곤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 내가 여기에 갇혀 있구나.”
소설가 교수 최성각에 대한 기억은 학교와 강의실에 머물러 있었다. 맥주 마시고 담배 피우며 강의 듣기, 악수 할 때 손가락이 부서져라 잡는 손, “열심히 해라. 열심히!”를 입에 달고 사는, 검은 뿔테 안경의 지독한 학구파의 모습. 나중에야, 파격적인 강의로 재주 없고 능력도 밑바닥인 우리에게 ‘무릇 소설가란 저런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문학청년의 모범으로 우뚝 서더니 바람처럼 ‘휘리릭’ 히말라야로 사라졌다.
스승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뭐라고 말을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인터뷰 요청 전화가 아닌 안부전화로 연막을 터트려 놓고 나중에 이 메일로 기습을 했다.
홍대 앞에서 넋을 놓다.
전날 약속을 잡아놓고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이하 ‘풀꽃세상’)이 있는 홍대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풀꽃세상 간사분이 “최선생님은 지금 지방 출장 중인데요.”라고 한다. 분명 전화 통화에선 그런 말이 없었는데, 잊어버리기라도 하신 걸까. 그럴 리 없다고 수 차례 이야기 해보았으나, “오늘은 분명히 오지 않으시고, 오시더라도 새벽에야 도착하신다.”고 한다. 아마 내일 탑골 공원 집회 하는 곳으로 출근할 것이라고...
홍대 앞 교차로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오후 다섯 시가 지났는데 바람은 없고 땀이 비 오듯했다. 역시 스승을 만나 인터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집으로 와서 메일을 확인했다.
“그딴 것 하지 말자. 그냥 만나서 콩국수나 먹자. 되게 오랜만이구나, 그치?”
지난 7월 25일 새벽, 북한산 관통터널 저지를 위한 농성장에 130명의 폭력배들이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음날부터 이 사태를 규탄하기 위해 시민단체 집회가 열렸다. 최성각 선생은 집회 장소로 출근할 것이고, 가서 기다리다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만나는 곳이 카페든 집회 판이든 어떤가. 만나기로 했으니 날짜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고.
7월 30일 화요일, 집회 준비모임을 열시 전에 한다고 했는데 어째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기자들만 오간다. 최성각 선생은 집회 시작 오 분전에 웃으며 도착했다. 처음에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 하고 어느 신문사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다 곧 나를 알아보고 반가움과 감회가 뒤섞이는 것 같았다. “아니, 너구나! 야, 반갑다. 내가 학교를 떠난 지 몇 해 만이지?”
하지만 그는 곧 집회에 참석해야 했고, 집회가 끝나고 만나기로 했다. 북한산을 관통하는 ‘서울 외곽 순환도로 건설 저지’를 위한 농성장에 난입한 폭력배들의 정체를 밝히고 진상을 규명하며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기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 집회였다. 꽤나 많은 환경단체가 참석했다. 탑골공원의 노인들은 오늘 또 무슨 일인가 하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픈 우리 시대,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사회는 언제나 대변자가 있습니다. 경제 또한 대변자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은 대변자가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의 역할과 위치가 정립됩니다. 자연의 대변자는 공생의 가치를 느끼고 스스로 낮아지려는, 바로 여기 모인 환경 운동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깊은 밤,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기습을 당했습니다. 괴한들은 병원에서 막 퇴원한 스님의 입을 틀어막고, 한 젊은 예술가의 가슴과 머리에 쇠파이프로 무수히 내리쳤으며, 밧줄로 온몸을 포박하는 치욕을 안겨주었습니다. 종파와 교리를 떠나, 존중받아 마땅할 성역을 모욕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폭력 앞에 무대책, 모욕 앞에 무방비의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과연 최선을 다해 운동을 하고 있는지, 혹시 우리의 진정성이 부족하지나 않았는지, 우리가 습관적인 운동에 빠져 있지나 않았는지 자성하게 됩니다. 시민들의 불감증에 혹시 우리들의 책임은 없는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슬픈 우리 시대,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이 되풀이되는 폭력과 무관심에 우리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 최성각, 풀꽃세상 연대사
최성각은 용역깡패들에게 습격을 당한 수경스님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평소 폭력에 치를 떨던 사람이었다. 그의 눈매는 더욱 매서웠고 연설 도중에는 음성이 가늘게 떨리기도 했다. 집회가 정리되고 YMCA까지 행진했다. 그는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와 담배를 권했다. 사제간의 맞담배질이다.
최> 수경스님 하고는 참 인연이 깊지. 뭐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지> 언제부터 알게 되셨나요?
최> 그게 2년 전 여섯 번째 풀꽃상을 ‘지리산의 물봉선’(본상)에게 ‘드리고’ 실상사의 세 스님(도법, 수경, 연관 스님)께는 부상을 드렸는데, 그때 만나게 되었어. 어서 일어나셔야 할텐데.
집회장에는 그를 알아보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때문에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최성각은 그저 활짝 웃으며 ‘아, 그래요.’ 하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하고 이야기를 한다.
최> 야, 여기선 이야기하기 힘들겠다. 그 얘긴 방에 가서 하자. 오는 길은 알지? 풀꽃 방 사이트 들어가면 거 약도 있거든. 찾아서 와 봐. 좀 있다 보자, 응?
피카소 거리라 부르는 곳 근처에 있는 풀꽃 빌딩은 담쟁이가 건물의 반을 덮고 있었다. 그 위에 지렁이에게 상을 드렸다는 문구가 적혀있고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건물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단체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싶은데, 근처 건물들도 기이하게 생겼으니 미학적 시각이 부족한 분들, 그 동네 가는 것이 심히 걱정된다.
건강해 보이는 분이 생글생글 웃으며 맞아 준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무슨무슨 풀씨라고 부르는데 낮에 집회장에서 봤던 풀씨분이 디지털 카메라에 담은 것들을 부지런히 옮기고 있었다. 주변이 대학 총학생회 사무실 같기도 하고 마감이 임박한 글쟁이 방처럼 주변이 어수선하다. 끊임없이 전화가 오고, 정 대표가 부르고, 일하는 풀씨들이 물으러 오는 통에 녹음기를 들었다 놨다하고 대화는 자꾸만 끊긴다. 인터뷰가 참으로 어수선하다.
최> 주변이 좀 어수선하지? 이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말이야. 정리 할 것도 많고.
지> 아뇨. 생동감 있어 좋아 보이는데요. 학교에 계실 때 보다 더 좋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최> 그래? 내 얼굴이 좋아졌나? 사람들은 내 인상이 좀 날카로워 보인데. 잠깐만, 사진 찍으려면 안경을 써야 하거든. 가만있자 내가 안경을 어디다 뒀더라.
그는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자료와 책 속에서 안경을 찾는다. 식물도감, 멸종위기에 놓인 동물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고 한 귀퉁이에 ‘앙성 복숭아’라고 적힌 박스가 차곡차곡 올려져 있다. 분주히 안경을 찾던 그를 정상명 대표가 불렀다. 그는 정 대표와 이야기를 하느라 한참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간한 글쟁이 방처럼 어수선하다.
최성각은 1955년 강릉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7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198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 <잠자는 불>, <택시 드라이버>, <부용산>, <사막의 우물 파는 인부>가 있다. 건양대 겸임교수, 중앙대, 명지대 강사. 현재는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의 사무처장이다.
환경운동을 왜 하냐고? 아름다운 곳에서 자랐기 때문이지.
지> 탑골공원 집회장에서부터 이곳 풀꽃 방에 들어올 때까지 느낀 거지만 상당히 바쁘신 것 같습니다. 만나 뵙기도 좀 힘든 것 같고요.
최> 풀꽃세상이 점점 알려지고 회원이 늘어나면서 할 일은 점점 많아져. 일을 나눠서 해야하는데 일손이 부족하니까 점점 바빠지는 것 같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뭐.
지> 어떻게 풀꽃세상을 만들게 되셨나요?
최> 여기 대표로 계신 정 선생님(정상명 대표)하고는 11년째 알고 지내는 사이야. 후배하고 출판사 열려고 방 구하다 알게 된 사이지. 나중엔 누님처럼, 나이 든 친구처럼 가끔씩 만나오다가 1999년에 함께 일 하게 되었어. 정 선생님께서 따님이신 풀꽃(초영)을 사고로 잃으신 뒤에 “남은 생을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 최 선생님, 도와달라”고 하셨거든. 그래 내가 “환경운동이 화급한 일입니다.”라고 했지. 그리고는 둘이서 환경단체 풀꽃세상(www.fulssi.or.kr)을 만들고 지금까지 오게된 거고.
지> 여기서 하시는 일은?
최> 내 이름 앞에 사무처장이라고 붙여놨어.
지> 왜 환경운동을 시작하셨어요?
최> 왜냐고? 아름다운 곳에서 자랐기 때문일 거야. 난 강릉에서 태어났어. 뒷도랑에서 미꾸라지며 가물치도 잡고, 큰 개울이었던 남대천에서 꾹저구(?) 하고... 꾹저구 알아? 미꾸라지, 은어, 자라 같은 걸 잡으며 자랐어.
온 세상이 고향처럼 아름다운 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커서 이 땅 여기저기 그리고 배낭 매고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녀 보니까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고향 자연은 특별히 아름다운 곳인 거라. 가끔 누가 나에게 왜 환경운동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아름다운 곳에서 자랐기 때문일 거라는 대답을 하곤 해. 그 아름다운 곳이 망가지는 것을 봤기 때문이지.
처음에 ‘꾹저구’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서야 그것이 몸길이 12cm 가량의,
담수에 사는 망둥어과 민물고기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꾹저구 하다’는 것은 꾹저구를 잡는다는 뜻일까? 아무튼 어린 시절을 촌 동네에서 보냈던 것이 그가 자랐던 주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맑은 바람소리나 아늑한 산, 물 반 고기 반이었던 강까지. 물론 도시에서는 그런 것들 대신 정겨운 골목길이나 사람냄새 나는 것들일 수도 있겠다.
지> 저도 강원도가 고향인데 선생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제가 태어난 고향이 정말 아름다운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요즘 들어 더 드는 것 같습니다. 객지 생활하니까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최> 그래. 네 고향이 영월이지. 맞아.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지> 선생님 어렸을 적 이야기 좀 해주세요.
최>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돼지를 스무 마리 정도 키웠어.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으니까 1966년인가. 시내 옥천동 남대천 가에 있었던 돼지막에 꾸정물을 퍼 날라 돼지 밥 주고 그랬지. 어느 날 아버님이 갓 태어난 새끼 돼지 한 마리를 강에 버리는 거야. 어미돼지 젖은 열 두개인데, 돼지는 열 세 마리가 태어나 그 중에서 가장 약한 돼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런데 어린 내게는 그 모습이 아주 충격적이었어.
아버님이 새끼 돼지를 버리던 날 밤에 내가 몰래 나가 아직 떠내려가지 않은 새끼 돼지를 구해서 돼지 막사에 도로 갖다 놨어. 그런데 다음날 아버님은 그 돼지를 다시 버리시더라고. 그런 아버님의 모습을 보니까 분하기도 하고 돼지가 불쌍하기도 해. 그래 소년조선일보에 우리 아버님을 고발하는 글을 써서 응모했는데 이게 입선이 된 거야.
지> 돼지도 충격이겠지만 글이 입선된 것 때문에 난감 하셨겠어요. 선생님께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최> 그땐 어려서 아버님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 그래도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생이 될 때까지 아버님의 돼지 키우는 일을 도왔어. 서양 애들처럼 말한다면, 나이 드신 아버님은 내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무학이셨던 아버님은 순전히 그분의 생활과 인격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셨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책을 쓰고 박사는 아니었지만, 스콧 니어링 같으신 분이셨지. 자신에게 남몰래 엄격했고, 타인들에게 관대하고 그런...
나중에야 내가 변변찮은 글쟁이가 되었는데, 이청준 선생님이나 박완서 선생님처럼 어머니가 아니라 그렇게 된 건 순전히 아버님 때문이라고 생각해. 만약에 전쟁이 나서 전선에서 총알받이로 허벅지에 재수 없이 총이라도 맞게 되면 ‘어머님’ 하고 부르짖을 게 아니라 ‘아버지’, 하고 부르짖을 게야. 틀림없이.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일생 동안 흘릴 눈물의 80%는 다 흘렸기 때문에 이제 남은 눈물은 얼마 안 될 것 같아. 6월항쟁 때, 한열이 죽었을 때 연세대에서 시청광장까지 걸어가며 펑펑 운 것이 3%였다면, 유신시절 때없이 찔끔찔끔 흘린 눈물이 5%, 떠난 여자들 때문에 흘린 눈물이 또 몇 퍼센트, 그래서 흘릴 눈물이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지.
지> 삶의 밑바탕이 되셨던 거네요.
최> 그런 것 같아. 아버지 콤플렉스 같은 게 내 밑에 깔려 있는 것 같기도 해.
지> 환경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부터인가요?
최> 잠깐 얘기했지만 고향이 망가지는 걸 보면서부터 일거야. 그때는 고향에서 횡단보도 없이도 느릿느릿 고무신 꺾어 신고 걸어가도 되었거든. 차가 사람을 기다렸고 마을에 몇 발자국 걸으면 다 아는 사람이었는데, 원시공동체까지는 아니지만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느림의 가치’가 존재했어. 조금 자라서 대관령이 뚫리고 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 공사가 벌어지는 걸 봤어. 그때는 그 일이 아주 큰 사건이었어. 눈 덮인 대관령의 신비가 끝장나는 순간이기도 했고. 느릿느릿 걷던 고향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빨라지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에서는 이상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해. 고속도로가 나면서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고,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입에 자주 올리는 이야기들은 죄다 ‘발전’ ‘개발’이고 어른들의 얼굴에 흥분이 감도는 것 같았거든. 소비가 부추겨지고, ‘잘 산다’는 게 ‘돈을 많이 가진 것’ 하고 같은 말로 쓰이기 시작하더라고. 그 즈음, 고향을 떠났어.
지> 그럼 본격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해서 글을 쓰신 건 그때부터네요.
최> 확실하게 ‘이때다’ 라고 말하긴 그렇고 쓰게 된 건 훨씬 나중이라고 봐야겠지. 81년에 낙동강 발원에서 부산 구포까지 뗏목으로 노를 저어 내려가 본 적이 있었어. 그때 강은 심하게 오염되어서 있어서 허리가 휘어진 기형어, 죽은 철새들을 목격했지. 당시만 해도 환경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니까. 나중에 그걸 강원일보에 연재했고.
그의 글이 ‘생태소설’이라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1989년, '작가세계' 두 번째 권에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다>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1992년에 상계 소각장 건설 반대 운동을 하고 '녹색평론'과 여러 환경 매체에 글을 기고하면서 이 소설가의 환경운동은 시작한다.
지> 대학 때는 어떠셨어요?
최> 아주 나쁜 시절이었어. 맨날 밤에 가위눌린 듯한 꿈을 꾸었어. 키 작은 '가짜 사무라이' 한 분이 평생 이 땅 대통령을 차지하겠다는 게 너무나 이상스럽고 해괴한 일이었거든. 할 수 있는 가능한 방식은 술집에서 그 어이없음에 기염을 토하는 것뿐이었어. 80년대 애들이야 거리로 뛰쳐나갈 수 있었지만, 70년대 유신시절에는 그게 가능하지 않았거든. 어줍잖은 글을 써서 허락되는 대로 학교 이런저런 지면에 은유적으로 썼어. 나중에 내가 무슨무슨 시꺼먼 리스트에 올랐더라고. 대학 다닐 때 기관원들이 우리 집을 들락거리면서 책상서랍을 뒤졌고, 내가 지닌 책의 목록을 적어가곤 했어. 갖고 있는 책이 곧 그 사람의 생각이라고 성급하게 간주한 그 애들이 제일 두려워한 게 반(反) 박정희였잖아.
70년대 중 후반에 내가 다닌 학교 블랙 리스트에는 나하고 2명 더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약대생 이었던 한 사람은 나중에 건강사회약사회를 만들더라고. 다른 한 학생의 소식은 모르겠고.
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이네요. 참, 광산촌에도 잠시 계셨단 이야기는 예전 우찬제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거든요?
최> 대학공부 마치고 그곳에서 교사생활을 했었어. 서울에서 다니던 대학 전에 먼저 나온 학교 요구가, 하사 계급장 주고 소집해제로 병역을 필하려면 5년 동안 교직복무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거기서 박정희가 죽었다는 걸 들었지. 세수를 하다가 들었는데 갑자기 찬물에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는거야. 가위눌리고 신음하고 어둡던 20대가 그렇게 마감되더라고. 우찬제 선생님은 좀 나중에 알게 됐어. 그때 그분이 대학 신문 기자 하실 때였을거야. 광산촌 취재를 하러왔는데 그때 만나서 밤새 소주도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알고 지내게 된 거지.
지>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최> 오랫동안 연애를 했었는데 내가 광산촌에 있다는 이유로 끝장이 났어. 그리고 한참 뒤에 참하고 착한 여 선생님과 결혼을 하고, 딸애를 낳았지. 그리고 좀 있다가 대학 때 가깝게 지내던 선배가 잡지 창간하자는 전화를 하더라고. 그 전화 받고 나서 아내랑 함께 사표를 내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 84년께에. 그땐 그야말로 잡지 춘추전국 시대였어. 잡지사는 보기 좋게 허물어졌고 난 6개월 정도 일했나? 그러다가 곧 사표 냈어.
지> 생활도 생활이지만, 주변에서 바라보는 눈도 있었을 텐데.
최> 하하, 그랬지. 하루는 시골에서 장모님이 서울에 올라셨는데 셋째 사위가 추리닝 바람으로 책만 가득한 집에서 타자기나 톡톡, 치고 있는 게 영 불안했는지, 가실 때 찔끔찔끔 우시더라고. 당신 셋째 딸 때문이었었나 봐. 그래 “내가 어머님, 전 지금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시려면 우리 집에 다시 오지 마십시오.” 라고 했어. 그땐 참...
지> 글쓰는 사람들 재택 ‘근무’하는 건 남들 눈엔 맨날 노는 걸로 밖에 안 보이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나중에 작가가 되셨잖아요.
최> 한 번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긴 했지만 중앙 일간지 통해서 한 사람의 작가로 등단한 건 86년이었어.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이었고. 그 내용이 76년에 실제로 일어났던 광산촌 집단히스테리 현상인데 내가 살면서 체험한 것에다가 살을 붙여썼지.
당선 알리는 전화를 받았던 날에 어머님께 그 소식 알리고 어려울 때 걱정해 주신 분들하고 점심 먹으려고 했더니만 집에 쌀이 떨어진 거야. 13평 연탁 화덕 아파트 구들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냉기가 쫘악 흐르고 방엔 둘째 딸애 기저귀가 펄럭이더라고. 그때...
지> 나중엔 형편이 좀 나아지셨나요?
최> 무슨, 나중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아무나 만나고 그러면서 직장생활에는 적응을 못했어. 길고도 긴 보람찬 ‘날건달’ 생활이 시작 된 거지. 아휴, 다시 떠올리기도 끔찍하다. 생략하자.
그 보람찬 ‘날건달’ 생활의 잔재가 우리에게 전달 된 것 같다. 강의 하다가 빙 둘러앉은 학생들이랑 맥주 한 캔씩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웃고 그랬다. 유난히 깨끗함을 강조하는 학교에서 그는 그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히말라야로 떠난 것이 아닐까
지> 들어오는데 풀꽃빌딩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렁이에게 풀꽃상을 드렸습니다.” 라고 써 있고 지렁이도 한 마리 달려 있던데요.
최> 지렁이에게 환경상을 ‘드린’ 단체의 사무국이 있는 건물이니까, 사람들이 ‘지렁이빌딩’이라 부르는 것이야.
지>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서 하는 일이 뭐죠?
최> 새, 돌, 풀, 지렁이 등에게 풀꽃상을 `드리는' 방식으로 운동을 하는 환경단체지.
지> 상을 주는 게 아니라 ‘드리다’니요?
최> 식물이라는 게 그냥 살아서 숨만 쉬는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다른 생명체하고 서로 교감도 나누고 하는, 사생활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해. 자기네들의 혼과 개성을 부여받은 창조물 인 거지. 그래서 우리가 풀꽃상을 준다고 하지 않고 ‘드린다’라고 한 건 마땅한 일인 거고.
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동등한 관계회복이란 말이지요?
최> 대등한 관계라기보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는 말이 옳겠지. 사람은 자연의 일부일 뿐인데 산업화사회를 맞이하면서 인간의 오만이 극에 다달아 자연의 주인인양 뻐기며 온갖 어리석은 파괴를 일삼고 있잖아. 이런 무례한 태도는 우리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례하고 난폭한 태도라 할 수 있어. 그래서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자.” 라고 말하게 된 것이지. 가장 중요한 말이 아닐까 싶어.
지>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주로 온라인 내에서 운영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온라인 공동체인데 여느 곳하고 다르게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 온라인으로 만난 회원들이 결국에는 오프라인에서 만나지. 회원들끼리 서로 형제애 같은 걸 느끼는 시민단체는 우리나라에 풀꽃세상밖에 없을 거야. 우리 일꾼들은 회원을 섬겼고, 회원들은 그 섬김의 진정성을 믿자, 폭발적인 에너지를 표출하신 셈이지. 그래서 풀꽃세상은 한국 시민단체들 모두 도달하려고 하는 ‘시민있는 시민단체’를 모범적으로 실현한 셈이야. 회원(시민)들이 바로 단체의 주인이고 참여자라는 의식을 우리 회원들은 지니고 있지. 참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어.
지> 이장님 하고 부녀회장도 있던데요.
최> 온라인 상에 ‘풀씨마을’ 이란 게 있는데, 마을이 있으니 당연히 이장님과 부녀회장님이 계신 셈이지.
지> 그것 말고도 고물상, 장터 같은 것은 어떤 의미로 만들어진 거죠?
최> 고물상은 잘못 구매한 물건들, 지금은 안 쓰지만 누군가 더 쓸 수 있는 물건들을 온라인상에서 거래하고, 실물을 주고받는 재활용운동인 셈이지. 장터는 오염되지 않은 먹을거리, 혹은 귀농해서 유기농 짓는 회원들의 땀의 결과물(농산물들)들을 다른 회원들이 아주 비싼 값으로 고마워하면서 나누는 장이고. 그 밖에 독서토론방도 있고, 채식방도 있지. 모두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야.
풀씨마을이라는 공동체(http://www.fulssi.or.kr/fultn/profile1.htm) 안을 들여다보면 마을회관도 있고 주책바가지 이장 갈풀, 부녀회장 푼수풀, 작명소장 풀 등의 체계도 잡혀있다.
지> 홈페이지 운영은 직접 하고 계시나요? 카테고리가 많아서 운영하는데 손이 많이 갈텐데요.
최> 처음엔 아무 것도 모르고 순전히 배워서 만든거야. 보기에 좀 그렇지? 아직은 내가 운영자인 셈이야. 하지만 우리 홈페이지는 2,500여 회원들과 같이 만들어 가는 모두살이(공동체)이지. 어떻게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겠어?
지> 여긴 각자 이름 대신에 무슨 ‘풀씨’라고 하는 별명을 불러 주는 것 같습니다. 아까 보니까 선생님을 ‘그래풀’이라고 부르던데 어떻게 생긴 이름이죠?
최> 내가 평소 입버릇이 “그래, 그래, 잘 될 거야!” .그런 말을 자주 쓴 모양이야.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고, 그게 아이디가 된 셈이지. 정상명 대표는 손도 크고 발도 크다고 ’왕풀‘이라는 이름을 젊은 회원들이 붙여주었어. 나중에 회원들 모두 풀 이름, 꽃 이름, 나무 이름을 하나씩 지니게 되었는데, 이 세상에 없는 꽃이나 나무 풀이름도 많아.
지> 그러고 보면 이곳은 여느 환경단체하고는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환경 단체라고 생각되지만 알면 알수록 다른 무언가가, 뭐랄까 ‘철학적 사유를 통한 행위 과정’에 있는 단체라고나 할까요. 일단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자체가 단순한 환경정의 내지 정책 비판 구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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