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유적·문화재 발굴…이재 대령－

그의 바람은 비무장지대에 놓인 궁예도성에 대해 남북한 공동 조사사업이 이뤄져 ‘태봉국’이 재조명되는 것이고.

한탄강 임진강이 흐르는 파주 연천 포천등지에서 천년 고성 많이 발견.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캠퍼스에는 ‘백년탑’이 세워져 있다. 육사의 영원함을 상징하는 이 탑에는 육사 졸업생 가운데 기수마다 2명씩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사람은 대통령상 수상자이고 다른 한사람은 ‘대표화랑’상 수상자이다.

대통령상이 성적이 뛰어난 생도들이 받는 상이라면, 대표화랑상은 졸업생을 대표할 수 있는 모범화랑에게 준다. 그만큼 선정기준도 까다로워 평가항목도 학업성적, 적성, 교유관계 등 10여개에 달한다.

백년탑에 새겨진 대표화랑들은 대부분 야전군인으로 나갔다. 김진영 전 참모총장(17기), 이준 전 국방장관(19기)도 대표화랑 출신이다. 육사 23기 이재 대령(60)도 백년탑에 이름이 오른 대표화랑이다. 그러나 대표화랑 출신으로는 드문 비야전 군인이다. 그의 현 직책은 육군사관학교 사학과 교수 겸 국방유적연구실장. 이교수는 1971년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을 가르치고 있다. 야전 경험이라곤 육사 졸업 직후 2년간 전방에서 소대장 생활을 한 게 전부.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전방에 가면 군인 축에 끼지 못하고, 학술대회에서 학자들을 만나면 오히려 군인으로 취급당할 때가 많지요”

이교수는 이러한 자신의 신분을 ‘나무도 아닌, 풀도 아닌 것’이라고 낮췄다. 여기에는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군인교수가 갖는 야전군인에 대한 부러움과 미안함이 배어 있다.

캠퍼스에 갇혀 있던 이교수에게 ‘야전’에서 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70~80년대 군부대 공사 중 적잖은 유물들이 출토됐다. 출토유물들의 조사·관리는 육사사관학교의 몫이 될 때가 많았다. 사학 전공인 데다 유물에 관심이 많았던 이교수가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90년대 들어 문화재청에서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보호구역 문화유적 중 군사유적만은 육사에서 수행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지요. 당연히 ‘예스’였지요”

육사 육군박물관의 ‘휴전선 일대 군사유적 지표조사 10개년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교수의 육군박물관장 부임은 사업 추진에 날개를 달아줬다.

“사실 휴전선 일대 문화유적 조사를 민간기관이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지뢰가 많은 데다 군사시설이 많아 접근도도 크게 떨어지지요. 실제로 지뢰가 깔려 있을지로 모를 미지의 땅을 발굴할 때면 모골이 송연한 순간도 많았습니다. 만약 지뢰를 밟았다면….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죠. 어떨 땐 감으로 땅을 더듬어가는 경우도 있었지요”

94년 파주군에서 시작된 ‘군사유적 조사사업’은 연천(95), 철원(96), 포천(97), 김포(98), 강화(99~2000), 화천(2001), 양구·인제(2002)를 거쳐 올해 고성군에서 마무리됐다. 10년간의 유적조사는 대성공이었다. 조사결과 확인된 군사유적만 해도 산성 67곳, 봉수터 57곳, 돈대(군사초소의 일종) 55곳 등 모두 221곳. 산성 중에는 지금까지 문헌에도 전하지 않은 성들이 대부분이어서 산성 연구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군사보호구역 안에 방치된 철원 ‘궁예도성’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낸 것은 ‘군인 학자’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성과이다.

“조사된 성곽들은 대부분 천년이 넘은 고성(古城)들입니다. 특히 임진강·한탄강이 흐르는 파주·연천·포천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됐는데, 강 양안에서는 많은 구석기·신석기 유물들이 함께 수습됐습니다”

이교수는 고성들이 강을 끼고 발견된 것은 임진강이 신라·고구려·백제 사이의 국경하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수천년 전이나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지금이나 임진강 유역은 쟁탈의 요소인 것이다. 또 석기유물이 많이 발견된 것은 이 지역이 주거지로서 휼륭한 여건을 갖췄음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쨌든 매년 조사결과는 ‘군사유적 보고서’로 차례차례 결실을 맺었다. 지금까지 펴낸 보고서는 10권. 문화재청, 도·시·군 지자체, 군부대에 배포된 보고서의 위력은 컸다.

문화재청은 육사박물관의 지표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일부 산성, 돈대, 포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칠중성·오두산성(파주), 반월산성(포천)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호로고루성·당포성(연천), 고모리산성(포천), 소달산 봉수터(고양)는 도 지정 기념물로 보호를 받게 됐다.

유적 보고서가 군장병들의 교육자료로 활용되면서 문화재에 대한 군의 인식도 높아졌다. 이교수는 “군사유적 조사의 성공은 민간인 통제구역이 대부분인 조사현장의 출입을 승인한 일선 사단장 등 현역 군인들의 도움 덕분”이라며 공을 군으로 돌렸다. 군도 이교수에게 한강 이북에서 임진강 이남에 이르는 군사유적 조사에 대한 예산 지원을 약속했다.

이교수는 내년 10월이면 정년을 맞는다. 그러나 문화재 발굴·연구에는 정년이 없다. 요즘도 서울 남산 성곽터 시굴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교수의 목표는 전국 군부대에 흩어져 있는 군사유적을 조사하는 일이다.
또한 그의 바람은 비무장지대에 놓인 궁예도성에 대해 남북한 공동 조사사업이 이뤄져 ‘태봉국’이 재조명되는 것이고.

경향 매거진X  2003년 11월 10일

〈 글 조운찬·사진 박민규기자 sidol@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