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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Love Hantangang
한탄강백서

작성자 박영환작가
작성일 2003-11-01 (토)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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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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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과 철원 (박영환 작가)

▶ 원제 : 한탄강
▶ 박영환 (작가, 부산하남중학교 교감 선생님)


철원평야는 우리나라 5대 평야 중에 하나이다.
봉래호 맑은 물로 풍년을 구가하는, 그야말로 지평선이 보이는 곡창지대다. 금강산 유람객을 태운 전철이 쾌주를 했다. 뿐만 아니라 경원선 기차엔 다정한 우리의 이웃들이 풋풋한 인정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평화스런 고장도, 동족 상잔의 비극 이후, 허리 부분으로 군사 분계선이 지나가면서 잡초 속에 불임의 땅이 되고 말았다.

원래 삼팔선이 분단될 당시, 철원은 삼팔 이북, 즉 김일성 치하의 땅이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평야의 반 정도가 용감한 우리의 국군들에 의해 수복되었다. 김일성은 이 철원 평야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평야가 부족한 북쪽이니, 이 벌은 그야말로 잃어서는 안되는 황금의 땅이었다. 그래서 이 땅을 잃고 난 뒤 김일성은 배가 아파 일주일 동안이나 밥을 굶었다고 한다.

철원 평야의 남북을 뱀처럼 칭얼대며 이름도 괴이하게 흐른는 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탄강'이다. 나는 처음에, 이 강의 이름은 따로 있고, 전쟁 중, 강 가득 젊은이의 피가 처절하게 흘렀기에 '恨歎江'이란 별명을 얻었으려니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물론 처음부터 한탄스러운 뜻을 가진 '한탄강'은 아니었다. 처음의 '한탄'은 '은하수처럼 깊고 아름다운 강'이라는 뜻의 '한여울'을 한자로 옮겨 '漢灘江'이라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의 '한탄강' 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오히려 뜻이 있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태봉국을 세웠던 궁예의 회한에 찬 눈물과 6.25 의 처참한 참상 속에 젊은이의 피가 붉게 흐르면서 기어이 '恨歎江'으로 바뀌고 말았으니 음 따라 전이된 비극 앞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도 무슨 업보일까?
강의 생김새도 이상하다. 용암이 분출되어 깎아지른 절벽. 가쁜 숨을 몰아 쉰다. 강 폭은 넓은 곳이 60m, 좁은 곳은 8m에 불과하다 어떻게 보면 한탄내이지 강이 아니다. 그러나 길이는 110키로미터나 되고 깊이는 30 - 50m 나 되는 곳도 있으니 강이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 기괴한 강줄기를 따라 '한탄(恨歎)'은 계속되었다. 내가 ROTC 과정을 마치고 이곳에 서 장교로 생활을 할 때도 이곳은 숨이 막힐 정도로 증오와 살기가 가득했다. 철천지 원수가 된 듯 , 겨눈 총부리에서 뿜어내는 총알은 생명 빼앗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G.P나 O.P 같은 곳에서는 항상 몸을 움츠리며 노출을 피했다.
60년대 말의 KAL기의 피랍도 잊을 수 없는 '恨歎' 중 하나다. 하필이면 한탄스런 그 여객기가 한탄강 상공에서 납북될 게 뭐람. 당시, 나는 중위 계급장을 달고 대대 정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보관들의 피랍상황의 보고가 부대마다 달랐다. 정확하게 민간 항공기로 보고한 곳이 있는가 하면, 적기 출현, 한 술 더 떠서 기총소사까지 했다는 둥, 그런가 하면 어떤 부대는 아예 보고도 없었다. 연대장은 노발대발했다. 긴급지시에 의해 대대 정보관들은 모두 완전군장을 꾸려 연대장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를 했다.
얼마 후, 북쪽 GP의 집채만한 마이크 속에 납치된 승무원들의 생방송들이 궛전을 때렸다. 그녀들은 그곳에 와서 보니 북쪽이말로 '낙원' 중 낙원이라고 했다. 목소리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들은 20대 초반, 나와 나이가 비슷한 젊은 여성들이었다. 강압에 못 이기어 거짓 선전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슬프게 다가왔다. 명치끝이 몹시 아팠다.
그들은 끝내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오늘도 대남 유령 방송, '구국의 소리' 마이크를 잡고 세월의 비늘을 가르며 절규를 하고 있을 것이다.


궁예란 이름을 기억하는가?
눈이 하나라서 외로웠던 사람.
조각난 노래 귀퉁이에 천년을 낙서했는데
이 무슨 형벌,
흰 옷 한 벌도 용서받지 못하고
석양 드리운 이 들녘에 깡통들이 뒹군다.
철의 삼각지
백마 능선에 불쑥불쑥 일어나는 파편 조각들.
달리고 싶은 철마의 염원을 누가 막는가.
이 도시의 좌표를 읽어라.
불빛이 삭은 땅.
주춧돌이 남아 있어 위안이 될까
恨歎일래, 정말 恨歎.

철원은 국토의 중간쯤에 위치한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일찍이 궁예가 후고구려를 창업하고 통일 꿈을 엮던 곳이다. 결국, 18년만에 왕건에게 나라를 헌상하고 말았지만, 개국 초에는, 그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던 걸로 생각된다.
그의 왕궁 터는 금학산 주봉(主峰)에 초점을 맞추려 했으나, 한 쪽 눈이 없는 그는 원근법이 되지 않아, 마침내 옆 봉우리에 초점을 맞추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라가 빨리 망한 것이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이 지역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송강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금강산 유람을 했는데 그 때 금강산의 길목인 이곳을 지났다. 그때 그는 궁예 왕궁터에 들러 '궁왕 대궐 터에 까마귀와 까치가 지저귀고 있구나. 저 까마귀와 까치들은 천고의 흥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고 그의 기행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 행간에 아픔을 새겼다. 지금은 그때보다 몇만배 더 참혹한 참상이 전개되고 있다. 송강이 다시 살아 이 민족의 현장을 보게 된다면 이제는 붓이라도 들 수 있을런지!

철의 삼각지 - 북에는 평강, 남에는 철원 김화가 있어 삼각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밀고 밀리기를 수없이 거듭하던 땅. 철원평야를 차지하려면 백마고지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그야말로 혈전이 될 수밖에 없었고 열흘 동안에 주인이 스물 네번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 공방의 포탄 속에 젊은 시신들은 산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철의 삼각 지대에는 희생된 장교들의 군번만 해도 한 트럭은 될 것이라고 한다. 물론 과장이 다소 있겠지만 그만큼 젊은이가 엄청나게 희생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정말 恨歎, 또 恨歎이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철원 시가지는 포화로 불탄 이후, 잿빛 도시가 되었다. 노동당사, 은행, 학교, 경마장, 공장 등등, 모든 건물 및 시설들이 찢어지고 으스러졌다. 아직도 민간 통제선 안에 있다는 이유로 복구를 못하고 있다. 잡초 우거진 속에 노을만 붉다. 적막이 흐른다. 유령의 도시다. 거미줄 칭칭 감고 박쥐들이 서식한다.
달빛이 아름답다는 월정리 역, 이곳에도 교교한 낭만이 잊혀진 지도 오래 되었다. 힘찬 기적을 울리며 원산으로 내닫던 북행 열차가 동강이 나서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희극적(?)인 팻말을 안고 그대로 멈추어 섰다.
안개비 질곡에서 철주를 심은지도 어느덧 반세기가 되었다. 정말 이대로는 안된다. 쇠말뚝을 뽑아 내자.
끊어진 신탄리역 - 철원역 - 평강역의 철로를 잇자. 다행히 아직도, 열차는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있다. 아가를 등에 업고, 남편을 찾아가던 아줌마의 찹쌀떡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그때의 승객들은 아줌마 곁에서 아가를 어른다. 언제라도 역장이 출발을 알리는 붉은 깃발을 흔들면 기차는 솜뭉치처럼 부푼 연기를 하늘 높이 날리며 북으로 향할 것이다.
달려가서 싣고 와야지. 동진호 선원들, 고상문씨, KAL기 승무원, 북송 교포, 그 외에도 억울하게 억류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 보고 싶은 사람, 그리운 사람, 모두를 싣고 와서 만나게 해야 한다.
철조망마다 더께가 된 붉은 이끼를 걷어 내고, '恨歎'이 아닌 '한여울', '漢灘江'에 서서 자락마다 풍성한 웃음소리를 만나고 싶다.

- 박영환작가 홈페이지( http://aahur.netian.com/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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