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명이 모여 계를 만들고 꼬박꼬박 돈을 내자는 약속을 했다. 계원들이 모두 돈을 관리할 수 없으니 이사 10명과 회장 1명을 뽑아 돈을 관리하는 전권을 맡겼다. 그런데 회장과 이사들이 “전권이 우리한테 있으니 계원들은 돈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선 참견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러나 계돈을 내는 건 약속으로 정했으니 꼬박꼬박 돈만 내라고 강요한다면? 그래서 나머지 989명의 계원들은 자신들이 낸 돈을 대표들이 어떻게 쓰는지엔 입도 못 떼고 그냥 ‘약속’대로 돈만 내고 있다면.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고? 있다. 국가에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하고 있는 우리 국민들이 지금 겪고 있는 실제 상황이다. 국민들의 납세는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조세법률주의), 그 돈을 어디에 어떤 절차로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법적 제약도 없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와 국회는 납세자들을 배제한채 예산의 사용처와 규모를 제멋대로 결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 기자는 지난 1월 7일 ‘예산에 대한 국민주권 되찾기’ 운동을 하고 있는 권해호 박사(세무사, 부산시 교육위원)를 부산에서 만났다.
2003년도 한국의 일반회계 세입예산안은 112조 2천439억원. 이 가운데 국민들한테 법인세, 소득세, 부가가치세 등으로 거두는 조세수입은 104조 3천431억원에 이른다. 곧 정부 수입 중 90%를 국민들이 세금으로 대고 있다는 얘기다.
세무사로 활동하며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한 권해호 박사가 연구해온 주제는 이렇게 막대한 돈을 내는 납세자인 국민이 정작 그 돈을 ‘지출’하는 부분에선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산지출과 관련된) 정치인 및 공무원들의 부정부패와 이에 관련된 국민들의 불만이 끊임없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돈을 어떻게 거두느냐’ 보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 즉 지출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한 사안인 것이죠.”
국민을 대표해서 예산을 통제하는 임무를 맡은 국회가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회는 복지, 교육, 국방 관련 예산 요구들을 어떻게 조화, 통합시킬 수 있나 고민하는 실질심의는 고사하고, 적법한 절차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5년 예산안도 2004년 12월 31일에야 가까스로 본회의를 통과했죠. 이건 헌법54조(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90일전인 12월 2일까지 다음해 예산안을 의결해야 한다)를 어긴 겁니다. 나라가 발칵 뒤집힐 일이 대한민국에선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어요.”
한국 국회는 예산을 효율적으로 감시, 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산낭비의 선두에 서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감사원이 내놓은 ‘주요재정투자사업 예산관리실태’ 감사 결과 국회는 무려 4조 7천710억원의 예산낭비 요인을 일으킨 것으로 나타났다. 의원들이 지방도로 공사 같은 ‘자기 지역구 챙기기’ 사업 등에 제멋대로 예산을 배정, 자신의 인기를 높이면서 ‘혈세’를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산 문제에서 국민을 배제하는 한국 헌법
이런 일이 벌어지는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권 박사는 국회가 ‘심의, 확정’하도록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것이 ‘예산법’이 아니라 ‘예산안’이라는 점을 들었다. 예산과 관련된 헌법 조문이 “국회는 국가의 예산안을 심의, 확정한다”(헌법 54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산법’과 ‘예산안’의 차이는 무엇일까. 권박사에 따르면 국회가 심의, 확정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이 예산‘법’인 경우엔 매년 세입과 지출이 모두 ‘법률’의 차원에서 다뤄지고 이에 따라 국민들이 정부의 예산운용에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예산‘안’으로 규정되어 있는 경우엔 국민들을 ‘왕따’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정부의 예산안만 국회가 처리한다는) 이론은 ‘국회가 정부를 통제한다’는 정도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과정에서 예산은 결국 국회와 정부 간의 관계, 즉 국가기관 내부 문제로 해석되어 버리는 거죠. 이렇게 국회-정부 외부의 국민들이 예산 결정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은 차단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 헌법이 ‘예산안’(예산법이 아니라)을 국회의 ‘심의, 확정’ 대상으로 규정, 주권자인 국민을 배제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권박사는 이를 지난 20세기의 군국주의 국가들, 즉 프로이센 제국과 메이지 일본의 유산으로 규정했다.
권 박사에 따르면 영국, 미국, 프랑스 3국은 한결같이 조세문제를 계기로 혁명과 전쟁을 경험하면서 세입과 지출 예산을 모두 '법률'에 따라 처리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군국주의 독일과 일본은 현재의 한국과 마찬가지로 조세는 법률로 부과하되, 지출은 법률이 아니라는 식으로 헌법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독일에도 세입과 세출을 묶은 ‘예산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비확장 예산에 대해 의회가 지출승인을 거부하자 비스마르크 정부는 의회 승인없이 예산을 집행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따라 헌법논쟁이 일어났고 비스마르크는 그렇게 증강시킨 군대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격파합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법학자 라반트였습니다.
그는 1870년 정부를 옹호하면서 ‘예산법(특히 지출 관련)은 법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안지켜도 되는 형식상 법률’이란 해석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1871년 탄생한 독일제국에서 라반트 이론이 자리잡습니다. 메이지 헌법의 설계자 이토히로부미는 이때(1882년) 독일제국으로 유학을 갑니다. 이토는 정부주도식 독일형 재정제도를 배우고 1889년 메이지 헌법을 제정합니다.
그는 독일헌법처럼 ‘예산법’에서 ‘법’자를 아예 빼고 그냥 ‘예산’으로 해서 메이지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독일처럼 ‘예산법’으로 만들면 전쟁을 위해 예산을 써야할 때 골치아프게 또 법해석 논란이 일어날까봐 아예 사전에 방지하려 했던 겁니다. 2차대전 뒤 일본헌법은 아직도 그냥 ‘예산’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일본 메이지 헌법을 “아무 고민없이” 베껴왔다고 권 박사는 설명했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할 때 유진오 박사는 이 메이지 헌법을 아무 생각없이 그대로 베껴왔습니다. 유 박사 자신도 ‘헌법기초회고록’이라는 글에서 ‘국가재정에 관해 나는 내 지식부족을 통감했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이러면서 우리 헌법에도 ‘예산법’이 아닌 ‘예산’으로 규정된 겁니다”
군국주의의 유산인 예산안 규정
예산을 법률로 뚜렷이 규정한 나라들과 그렇지 못한 나라들의 차이는 국민들이 예산지출에 관해 법적 권리를 갖고 감시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로 드러난다. 곧 ‘재정민주주의’의 차이다. 그리고 이 ‘재정민주주의’의 차이는 사회 전반의 민주주의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권 박사는 설명했다.
“독일과 일본 제국은 국민의 감시없이 정부가 예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는데 결국 군국주의로 나아가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의 독재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민주주의 발전 지체 현상, 전반적인 부정부패 등은 이런 결함에서 비롯된 면이 큽니다.
예산을 법률로 정한 영국, 미국, 프랑스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조세법률주의-예산법률제도-결산과 감사제도-국민의 최종 재정통제’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재정민주주의를 확립해왔습니다. 그리고 이 재정민주주의 확립이 전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실질적인 기반이 됐습니다.”
예산을 법률로 만들자는 예산법률주의가 재정민주주의를 이루고, 이에 바탕해 실질적 민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점에서 권 박사는 “예산법률주의는 실질 민주주의를 위한 초석”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예산을 법률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 “(예산안 규정이 기술된) 헌법 제54조를 개정해 ‘예산안’을 ‘예산법’으로 고치는 방법, 또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예산법률주의로 판례를 남기거나, 국회 해석으로 입법하는 방법”을 꼽았다.
그렇다면 예산이 법률 차원으로 ‘승격’될 경우 국민들은 어떻게 예산을 통제할 수 있을까.
“예산편성-심의-집행 전 과정을 국민이 감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들이 제 일도 안하고 예산심의 시한을 넘긴다면 국민들은 예산에 대한 법적 주체로 의원들 세비를 안주겠다거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심한 경우 납세자 소송도 할 수 있습니다. 도로 공사에 예산을 집행하는데 이걸 ‘지역구나 챙기자는 예산’이라고 납세자가 소송을 걸수 있다면 의원들도 겁나서 예산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예산이 법률로 된다면 정부 조직 안에서도 공사를 맡은 시공사한테 제대로 된 비용검토를 요구할 겁니다. 스스로 감시를 강화하게 되는 거죠.
법 자체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가 ‘500억 원 이상의 지출예산에 대한 사전심사’를 법률로 제정하는 겁니다. 만약 정부가 500억원을 잘 집행했다고 해도 사전심사란 법 절차를 어겼다면 관련 공무원들은 좌천감이 되는 거죠.”
복지 누리려면 납세자 권리 되찾아야
이러면서 권 박사는 예산에 대한 국민주권을 강조했다. “지금 납세자 권리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심판청구권이 있다고 하죠. 만약 1억원을 세금으로 잘못 고지했다면 여기에 이의신청, 심판청구, 행정소송 등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의신청에만 15% 수수료를 내야하고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결국 이런 부분은 손실을 보면서 원금도 제대로 못받게 됩니다. 이건 납세자 권리가 아닙니다. 세금을 부담한다는 건 납세자 의무인데, 그 의무를 부담했다면 그걸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권리, 예를 들어 국민들 관심이 많은 복지 확충으로 지출을 유도할 수 있는 권리가 바로 진정한 납세자 권리입니다.
억지로 본전을 찾으려는 게 납세자 권리가 아닙니다. 예산법률주의가 되면 국민이 누릴 이익은 이렇게 예산에 대해 국민주권을 되찾으면서 국민지위가 올라가는 겁니다.”
권 박사는 예산법률주의가 가져올 효율성도 언급했다. “지출예산에서 부정부패가 줄어드니 예산낭비가 상당히 줄어들겁니다. 지금 낭비되는 예산이 전체 예산에서 10～20%라고 합니다. 10%라 해도 130조원 예산에서 13조원이 낭비된다는 말입니다. 이 돈이면 각 지방 재정에 복지예산을 늘리는 방식으로 선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절감해서 꼭 필요한 곳에 예산을 늘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권 박사는 국민들이 예산주권을 되찾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할 수 있도록 국회를 압박하자고 호소했다.
전체 국가예산에서 10～20% 낭비
“민주주의는 법률-의회-조세법률주의-지출법률주의 4가지를 기초로 합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게 다 제도로 발전하고 있는데 지출법률주의는 빠져 있어요. 그 결과 예산을 지출하는 영역은 지금 전혀 감시가 안되고 있습니다.
감시 라이트가 꺼져 있으니 돈은 공돈으로 인식되고 먼저 본 이가 마음대로 쓰는 부정부패가 일어나고 있는 쓰레기통이 되었습니다. 이토의 계략에 유진오 박사가 놀아났다면 이제 예산에 ‘법’자를 넣어 예산법으로 만들고, 예산의 지출영역도 제대로 감시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법률에서 배제된 부분을 법률 영역 내부로 환원시키자는 거죠.
민주주의에선 나랏돈을 단 1원이라도 쓴다면 법률에 따라야 하는 겁니다. 곧 재정민주주의에 바탕한 법치국가가 비로소 시작되는 거죠. 예산에 대해 국민주권을 회복하는 문제입니다. 국민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예산 주권 되찾는 한 방법 ‘주민참여예산제’
납세자가 예산주권을 되찾는 한 방법으로 지금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목받고 있는 제도는 ‘주민참여예산제도’이다. 말 그대로 자치단체 주민들이 직접 자신들이 속한 시, 군, 구청 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제도다. 주민이 예산편성에 직접 참여해 현실과 동떨어진 낭비성 예산을 줄이고 민생과 밀접한 예산을 늘리는 우선순위를 결정하자는 게 핵심 취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주민참여예산제를 가장 활성화시키고 있는 자치단체는 광주광역시 북구청. 북구청은 지난해 3월 전국 최초로 ‘주민참여예산제 운영조례’를 제정해 예산 제안, 요구, 심의마다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구청은 인터넷 홈페이지로 예산 편성시 재정운영과 살림살이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주민들에게 공개하면서 주민참여를 보장한다. 또 주민들 역량 강화를 위해 ‘주민 예산학교’를 운영하고 수시로 공청회, 토론회도 연다. 주민들은 80명 이내로 구성되어 활동하는 ‘예산참여시민위원회’에 들어가서 실제로 예산편성과정에 참여한다.
시민위원회는 광주 북구 26개동의 주민자치위원회가 추천하는 26명과 시민단체,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다. 이렇게 짜인 시민위원회 위원들은 주민예산학교와 공청회, 토론회 과정을 거치면서 제도에 대한 역량을 기른다. 그뒤 구청 각 부서에서 작성한 예산안요구서를 검토하면서 예산편성 작업에 실제로 참여한다.
가장 필요한 예산, 공무원보다 주민이 더 잘안다
이 제도를 주도한 김재균 광주시 북구청장은 “제일 어려운 점은 복잡한 절차를 꺼리는 공무원들의 의식 문제였지만 지속적인 교육으로 설득해갔다”며 “지방의회와 충돌 문제도 의원들이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요구사안이라 대부분 수긍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북구청은 2003년에만 시민위원회 33건, 인터넷 접수 13건 등 모두 46건의 ‘주민제안 사업’을 받아들여 이 가운데 36건을 예산편성에 반영하는 성과를 거뒀다. 청소년 수련관 주변 산책로에 음악방송 시설을 갖추거나 전남대 동물보호소에 전담 직원을 확보했고, 또 정신지체장애인을 위한 주말학교 운영처럼 주민생활에 와닿는 사업들이 참여예산제로 실현됐다.
이원희 경실련 예산감시위원장은 “예산감시가 사후적인 작업이라면 참여예산제는 어떠한 항목에 얼마가 예산으로 들어가는 지 사전에 감시, 결정하는 작업”이라며 “폐쇄적인 관료들을 넘어 복지, 문화, 환경 부문에서 주민들의 실질적인 요구가 표출되고 반영될 수 있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이종석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도 “재원은 한정돼있는데 이를 가장 잘쓰기 위해선 주민들이 가장 원하는 방향으로 써야하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직접 당사자인 주민들 의견을 직접 수렴할 제도가 필요하다”며 “그게 바로 참여예산제로 사회복지, 지역경제, 주민 기초 삶의 질 문제를 다루는 기초단체 행정에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구청장은 참여예산제에 대해 더 폭넓게 해석했다. “이 제도로 주민들이 잘 알지 못했던 예산을 사전에 통제할 수 있는 민주주의 학습과정을 경험하고 있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이 제도를 채택한다면 이후 국가예산에 대한 국민참여예산제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 같은 재정민주주의에 바탕해 실질적인 참여민주주의로 나라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예산주권, 정부-국회에서 돌려 받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