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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그려보는 한국 과학사 - 4.이태규,리승기
인물로 그려보는 한국 과학사 - 4.이태규,리승기 남, 북한 과학계의 거목들 - 물리화학분야에서 리 아이링 이론을 창안한 이태규, 비날론 생산으로 북한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은 리승기 근현대 시기의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기술자는 누구일까? 물론 학문분야 간 비교의 어려움이 존재하고 사람에 따라 시각의 차이가 있어 그 대답을 찾기란 쉽지 않을 듯 싶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한의 이태규(1902-92) 박사와 북한의 리승기(1905-96) 박사를 우선순위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과학기술의 면에서 볼 때 불행한 시기에 등장해서 활동을 한 사람들이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낙후한 과학후진국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아 자신의 활동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는 것조차 힘들었다. 숱한 정치경제적 혼란은 그들의 과학활동을 안정된 상태에서 적절한 지원을 받으며 추진해 나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뛰어난 과학적 재능을 발휘했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일까? 분명 과학기술에서의 불행한 시기와 그 속에서 일군, 어떤 한국인보다도 탁월했던 과학적 성취는 상호 모순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수수께끼 같은 문제의 답은 다름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빚어낸 과학활동의 이중성과 다른 국가로의 이동을 통해 열리게 된 과학연구에의 정진에서 찾아질 수 있다. 뛰어난 연구 업적으로 일본땅에 우뚝서다 이들은 식민지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과학에 관한 고등교육을 받고 연구경력을 쌓게 된다. 이태규는 중등학교 교원이 될 생각으로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진학, 졸업하나 차별 대우로 말미암아 발령을 받지 못해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교토제국대학 화학과를 마치고 이공계 분야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1931년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그 이전에 미국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두 명의 한국인이 있었으나 수업년한 및 연구경력 등에 비추어 볼 때 적지 않게 수준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리승기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일본의 마쓰야마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이어서 교토제국대학의 공업화학과를 마친 후 1938년에 역시 공학분야에서는 일본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게다가 이들은 당시 식민지 피지배민으로서는 꿈도 꾸기 힘든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되었다. 무엇보다 일본인 과학자를 능가하는 뛰어난 연구업적을 냄으로써 자신들이 지닌 능력을 널리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식민지 기간에 발표한 논문편수는 이태규 37편, 리승기 48편으로 일본의 유명한 과학자들에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수준에서도 이태규는, 물론 임용 이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물리화학 분야에서 리-아이링 이론을 창안하고 리승기는 섬유화학 분야에서 새로운 합성섬유인 합성1호(나중에 비날론으로 명명)를 개발할 정도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이처럼 이들이 억압적인 시대상황 속에서도 일찍이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일한 언어의 사용으로 외국어 습득에 어려움이 없었고 조기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 수준높은 교육과 연구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며, 국제수준의 일본인 연구자들과의 교류 및 경쟁을 통해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지리적으로 가까이에 위치해 있던 교토제국대학이 한국인들에게 비교적 관대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던 점 또한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결국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같은 기회를 전혀 가질 수 없었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는 꿈같은 행운이 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기라 할지라도 과학기술의 경우 분류학과 같이 지역적 특성이 강한 과학(local science)에서는(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이 보다 보편적인 과학(universal science)에서는 그 가능성이 훨씬 줄지만)국내의 연구자들이 일본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자의 대표적 인물인 석주명, 조복성, 원홍구 등과 후자의 선구적 인물인 이태규, 리승기, 김양하 등을 상호 비교해 본다면 그들 간의 차이와 특성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이후 기초과학이나 응용과학 분야에서는 어떤 면으로 볼 때 당시와 같은 연구성과들이 아직까지도 국내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국에서 연구 지원받지 못하자 외국행 결심 이들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서둘러 귀국했다. 똑같이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용을 받은 후 남한의 과학기술 건설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토록 고대하던 해방된 조국이었으니 이들의 포부와 기대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지닌 이상과 맞닥뜨린 현실의 괴리는 너무도 컸다. 당시 남한은 현대적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만한 기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그를 위한 정부의 의지도 거의 보이지 않는 척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다가 세계수준을 향한 이들의 연구의욕과 열정은 이들이 놓인 처지를 그대로 용인할 수만은 없게 만들었다. 이들의 과학활동은 지역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이고, 지역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한국적이 아닌 일본적인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한에서의 적응 및 정착은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쉽지만은 않았을 중대 결단을 내리게 된다. 즉 이태규는 자신이 방문한 적이 있던 미국행(1948년)을, 리승기는 네다섯 차례 이상의 권유를 받고 마침내 북한행(1950년)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 시기에 남한의 과학기술 발전에 남긴 발자국은 너무도 희미할 뿐이었다. 주변의 기대나 자신의 포부와는 달리 과학기술 거장들이 실제로 한 일은 없다시피 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서도 식민지 시기와 해방후의 과학기술 간에 가로놓인 심한 단절을 엿볼 수가 있다. 비록 이들은 식민지 시기에 탁월한 연구업적과 경력을 쌓았지만 그것이 곧바로 해방된 한국의 과학기술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과학기술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된 두 사람 그렇지만 이들의 과학활동이 당장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는 남한과 북한의 과학기술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 나갔다. 리승기의 과학연구는 중소분쟁을 계기로 대두된 자립노선에 힘입어 더욱 중요성을 얻게 되었고 드디어 1961년에는 대공장이 세워져 비날론 섬유가 빛을 보기에 이르렀다. 어찌보면 태평양전쟁 시기에 부상한 일본적 과학기술이 북한적 과학기술로 전환되며 결실을 맺게 되었음을 볼 수가 있다. 이후 북한에서는 석회석, 무연탄, 전기로 생산되는 비날론처럼 자체의 부존자원과 인력, 설비 등에 기반한 주체 과학기술이 주류를 형성하며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이태규는 남한의 과학기술 발전에 직접 도움을 준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역할을 간접적으로 했다. 그가 미국의 유타대학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과학활동을 벌임에 따라 상당수의 한국인 과학도들이 그곳으로 몰려갔고 이내 유타학파의 형성을 낳았다. 이들의 활동에 힘입어 남한의 경우 화학분야가 다른 어느 분야보다 빠르게 성장했고 물리학 전공자들도 초기일수록 유타 대학에서 제법 배출되게 되었다. 비록 그가 남한에 돌아온 것은 더 이상 연구활동을 할 수 없는 나이에 이르렀을 때였지만 그에 의해 배출되었거나 그의 명성에 이끌린 많은 사람들이 남한의 과학기술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몇년 전에 이미 평성시에 위치한 과학원 청사 앞에 리승기의 동상이 세워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업적에 걸맞게 영웅과학자로 불리며 높은 사회적 명성을 누리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에 비하면 이태규는 초라할 정도로 여전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그가 마지막 활동공간으로 보냈던 한국과학기술원에 최초의 과학자 기념관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것이 결국은 이 땅에서 과학연구를 하며 살아가는 과학도들이 자신의 과학활동을 스스로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김근배 /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 출처 : http://times.kaist.ac.kr/view.asp?gisa_number=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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