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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작성자 최종철
작성일 2022/06/18 (토)
첨부#1 지나간_이야기(황극열).hwp (28KB) (Down:2)
ㆍ조회: 25      

지나간 인생 이야기

지나간 인생 이야기

                                                             황 극 열
                                                        6.25참전용사, 시인

1. 출생과 월남

창원 황씨로 1931년 4월 10일(음) 강원도 평강군 남면 정연리에서 태어났다. 세살 때 평강군 남면 먹실 국빨골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산속에 가서 화전을 일궈 살다가 다섯살 때에 금화군 근북면 율록리 신석동으로 이사를 했다.

이렇게 된 사연은 큰 형님이 어려서 잣치기 하다 눈을 다쳐 서울에 가 병원 치료 받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살 수 없어 국빨골 산속으로 갔다. 2년 동안 살다가 신석동으로 이사 했다. 아버지(황일휴)가 신석동에 와서 1년후 마을에 구장을 맡게 되어 가세가 나아지게 되었다. 근북면 벌판에 70리 대형 수로가 생기면서 황무지 개간 사업을 시작하였다.

개간한 땅에 벼농사를 지면서 각 기관을 구장으로 출입하여 금화금융조합에서 활용자금을 대출받아 황무지를 사서 개간을 하면 이문이 많이 생겨 해마다 그런 식을 반복하여 10만평의 농토가 생겨 30명의 소작인으로 농사를 하니 시골 부자가 되고 근북면 유지 금화군 유지가 되었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자라며 7세에 한문공부 하면서 9살 때 근북국민학교에 입학했으며 15세 때 철원농업학교에 입학했다. 신석동에서 정연리 가서 금강산 전차를 타고 통학했다. 언제나 역장님은 우리 형제(황형열, 황극열)가 차를 타는 것을 보고 전차를 출발시켰다.

그해 8월 15일 연합군에 의해 우리나라가 광복이란 행복을 찾게 되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기뻐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에 나서 만만세를 외쳤던 것이 아니던가 그러면서 우리는 한평생 먹어보지 못했던 소고기를 먹기 시작을 했다. 어느 촌락이고 말할 것 없이 소를 잡아먹었다. 아버지는 농사질 걱정이 태산 같으셨다. 농사 지을 소를 모조리 잡아먹으니 어이하면 조을까 생각하시다가 하루 저녁 말꾼들에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농사 짓는 소들을 다 잡아먹으면 농사는 어이 하려느냐”시며 호통을 치신다.

그것도 잠시 38선 이북에 공산당이 창당되고 소련군이 점령하여 김일성을 수반으로 정부를 수립했다. 공산당 정권은 8.15해방에 기쁨도 없이 공산 정권을 세워 11월 28일에 반동이란 이름 아래 자본주의란 명목으로 숙청을 시작했다. 그날 밤 보안서에서 우리집을 급습을 했다. ‘재산이 많은 자는 반동이다. 땅은 물론이고 가사도구까지 몰수 손에 들지 말고 빈몸으로 100리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금화군보안서에 가두고 3만원 벌금을 가지고 오면 풀어준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을 알고 지냈으면 친일파 2차 숙청대상자이라. 우리는 반동과 친일파로 용서 받을 수 없지만 벌금을 냈고 선한 삶을 살아 여기서 형벌은 다 끝이 났다는 것이다.

셋째 고모부가 대광리에 계셔 집을 마련해 주어 대광리에 정착했다. 매일 30리 왕래하며 학교에 다니는 것 무리이다. 그래 묘장면 둘째 고모가 계시는데 학교까지 10리 밖에 되지 않아 둘째 고모집에서 학교는 계속 되었다. 반동에 자식 형제가 중등부 학교를 다닌다는 이유로 보안대의 감시를 받아왔다. 그때에 큰형님(황석열)은 소달구로 벌이를 했으며 집안에 안도감이 생겼다. 소작인 가운데 도지 주지 않아도 되는데 도지 줄 쌀을 밤에 몰래 대광리까지 70리길 달구지로 갖다 주고 가는 소작인. 도지를 팔아 현금으로 갖다 주는 소작인이 있어 생활했으며 우리 형제 학교도 다녔다. 소작인들의 이런 행위는 들키면 반동분자와 같은 형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 참 고마운 분들이였다. 선하고 착한 분들이였다. 항상 그분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월남하려고 38선에 와서 여관에서 밤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되어 38선을 넘으려 여관을 나오려 하니 그렇게도 친절하고 자상하게 38선 넘는 방법을 말하던 여관 주인 여인이 180도로 변하여 여관을 나가는 순간 보안서에 알리겠다고 엄포를 논다. 아버지는 이판 사판이니 즉접 보안서에 가서 사실을 말하고 양해를 구해 보겠다고 보안서로 가셨다. 보안서에 가보니 아버지 친구분이 보안서장으로 계서 이웃 마을로 이사 가는 것처럼 증명을 해주어 월남은 성공할 수 있었다.

2. 남한에서의 생활

포천으로 와서 서울 가는 나무 장사 차편으로 청량리까지 무사히 왔다. 청량리에서 안동행 열차를 탔다. 고향에서는 먹어보지 못한 고구마 장사가 소리 지르고 있는 제천에서 아버지는 고구마를 사서 식구대로 나누어 주셨다. 어이나 맛이 조은지 정말 꿀마시었다. 매포역에 도착 기차에서 내려 도담상봉으로 걸어 10리길 걸어왔다. 함밥집 하나를 차지해 등집을 버섰다. 단양군의 8경의 하나라 한다. 피난생활은 이제부터 시작이 되었다. 동쪽으로 10리길에 소백산이고 몇 집 안 되는 마을이자 석탄 광산 지대다. 광부들이 석탄을 캐고 있었다. 도착한지 하루도 쉬지 못하고 아버지와 3형제가 목상(木商)이 벌목하는대서 일했다. 한달간 일했으나 생활에는 부족했다. 작은 형님하고 나는 장작을 만들어 10리길 되는 매포역 5일 장터에다 내다 팔기도 했으나 그래도 생활에는 부족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체를 만들고 작은형과 나는 아버지가 만드신 체를 내다 팔았다. 산골에 10리를 가야 집 하나를 볼 수 있는 곳에서 허탕 치는 길을 종일 걸어가며 어쩌다 체 하나를 팔면 콩하고 물물교환이지 현찰은 없었다. 날마다 우리 식구는 콩죽으로 살았다. 이것도 신통치 않아 나는 고무신 지까다비 등의 장사를 시작했다. 며칠후 신값을 받기로 하고 외상으로 잘 팔렸다. 문제는 외상 수금이 잘 안되는 것이다. 3개월만에 신발 장사를 정리하고 말았다.

그런데 작은 형님이 행방불명이 되어 집안이 말이 아니였다. 그후 2개월이 되어 작은 형님은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 청량리에 가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니 여기서 일하는 것보다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을 데리로 왔다는 것이다. 나는 작은 형님 따라 가겠다고 말했다. 그 이튿날 기차표 없이 몰래 차를 타고 형님 따라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역 대합실 한구석에 곽 조가리 하나 깔고 우리의 안방처럼 살아야 했다. 우선 먼저 할 일은 지게를 마련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지게를 마련했다. 안동발 서울로 오는 새벽 3시차에서 보따리 가지고 내리는 분에 짐을 동대문 까지 운반해 주고 500원을 받는다. 아침 6시에 서울역 발 안동행 열차를 타러 밤부터 역에 와서 기차표를 사려고 줄을 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기차 손님은 많은데 표를 제한해서 팔며 대부분 야미표로 나간다. 나는 역부에게 한장 넘겨주는데 얼마식 주고 넘겨받아 제한 없이 파는 기차표가 줄에서 몇장 팔면 다 팔았다고 하며 표 파는 창구문을 내린다. 나는 담배 파는 아이들 5, 6명 데리고 화신백화점이나 동아백화점에 가서 줄을 서 있는 틈에 껴 있다가 새치기해서 한사람이 두장씩 사다 청량리 와서 파는데 상당이 남는 장사이다.

그러던 어느날 화신백화점에서 빨갱이로 몰려 종로경찰서에 구치 되었다. 내가 데리고 간 아이 하나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아이가 백화점 화장실에 갔다가 삐라가 있어 그것으로 휴지를 쓰고 나왔는데 백화점에 파견 나와 있는 형사에게 들켜 그 아이가 나를 지목해 주었다는 고로 내가 체포되여 경찰에 심문을 받는데 사실대로 고백하여도 인정을 못 받고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 당시 철원농업학교 동창 하나가 서대문서에 경위로 있어 그 친구에게 나의 신분을 알아보라했다. 그 친구가 연락을 받고 즉시 달려와 나의 신분보증을 섰다. 내 고향은 아니지만 나와 같은 처지의 한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형님이 되시는 분이 춘천경찰서에 경위로 있어 와서 신분을 보장받고 석방은 했으나 고문을 당해 그로 인해 돌아가셨다.

나는 그후 작은 형님하고 리어카에 잡화 장사를 하면서 차표 장사도 계속했다. 그런데 동대문경찰서에서 노점장사 취체반이 노점상인에 물건을 압수해 가서 노점장사를 할 수 없어 그만두고 역 앞 태백여관에 방 한칸을 얻어 화장품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가 쏠쏠히 잘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작은 형님이 행방불명이다. 몇 달이 지나 형님은 편지를 보내왔는데 5사단 15연대 여수에 와 군대에 있다는 것이다. 집을 나올적에 동생이 장사를 잘 하니까 생활에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1년후 큰형님이 들어와 같이 화장품 장사를 하자면서 형님을 동참 시켰다. 나 역시 작은 형님 말대로 이 기반에서 장사하면 생활에 걱정 할 것이 없다 싶었다. 그후 무진회사(보험회사)에 들어 매일 수금원 아가씨가 수금해 간다. 아가씨도 황해도 이북 사람이고 홀어머니와 여동생 하나를 거느리고 사는 가장이다. 매일 만나다 보니 친해졌고 아가씨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인사도 했다.

3. 수도경비사령부 입대 및 6.25전쟁 발발

나는 서울 전농동 굴다리 지나 세집에 살았으나 답십리 2동에 집을 사고 이사했다. 나의 근북국민학교 동창이 셋이 모여 군대에 입대하기로 약속했다. 1949년 6월 셋은 수도경비사령부 부평대대 창설 군인으로 입대했다. 작은 형님처럼 나도 말없이 집을 떠났다. 신병훈련이 6개월인데 2개월 받을 때 1중대 일보계 조수로 뽑혀 행정반으로 갔다. 그리고 몇 개월 되여 육군하사로 특진됐다. 식사 때면 훈련병들이 눈높이로 식반을 들고 밥을 갖다 준다. 같은 신병훈련 동기인데 민망스럽기 끝이 없었다. 그러나 군대니까 어쩔수 없었다. 나에 사무도 이제는 조수가 아니라 오야 노릇 하면서 오야는 소대 선임하사관으로 옮겨 갔다.

나는 처음 외출로 집에 왔다. 그리고 1년이 지나 북한 남침이란 6.25전쟁이 났다. 두번째 외출이였는데 토요일 밤을 가게에서 자던 나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나 들어보니 휴가 외출 나온 장병은 빨리 부대로 가라는 경찰 헌병의 소리였다. 인민군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답십리 집으로 돌아와 전쟁이 났다는 것을 가족에게 알리고 마즈막으로 집에서 잠이나 실컷 자고 가겠다고 잠을 자다 일어나 보니 낮 12시가 다 되었다. 내가 평상시에 조아하던 두부를 만들어 소댕 뚜껑에 바글 바글 끓여 놓으시고 내가 잠에서 깰때만 기다리고 계신다. 그 두부를 거의 다 먹고 부대로 가려 하는데 가족들이 마을 둑까지 나와 배웅을 한다. 뒤 돌아보지 안코 가다가 가족의 모습이라도 한번 더 보자고 나는 뒤 돌아 보았다. 가족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마즈막이라는 생각에 땅바닥에 업드려 가족들에게 큰 절을 올리고 청량리역으로 나와 보니 부대로 가는게 너무 막연한 것이다. 주위에 헌병을 찾아 사실 이야기를 했드니 그 때 마침 망우리 쪽에서 꼬마 다꾸시 하나가 와 헌병에게 징발을 당해 나를 태워 부평 부대까지 갔다. 내부반에 들어가니 완전 출동태세로 장구를 꾸려 놓고 대기중이다. 내가 끝으로 나간 사람은 빠짐 없이 귀대 완료 되였다. 나의 군장도 꾸려 놓았다. 그날 밤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사령부 작전명령에 의해 김포비행장으로 출동 비행장은 활활 타오르는 화염에 싸여 있는데 어딘지 확인이 되지 않은 무명고지에 배치 대기하고 있었다.

아침 6시경 원대복귀 명령이 내려 원대로 와서 식사를 하고 11시경 도보행군으로 수원에 도착 어느 함석 창고에 대기중 그날 밤 10시경에 기차편으로 영등포역으로 간다. 도 착 즉시로 인천 방면 영등포 둑을 넘어 오류동 야산 기슭에 배치 대기중 날이 밝아오니 그 야산 봉우리에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적군을 확인한 이기성 대대장(소령)은 부대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고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한국 계급 일등중사였던 나는 공격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각자 분산 후퇴 했다.

나는 1중대 대원들 하고 후퇴하면서 피난민들과 합류 했다. 그 피난민중에서 “아가야 너의 아빠는 어디서 후퇴 하고 있을까”하며 아기 업고 가슴에 보따리 달고 양손에 보찜을 들고 피난민 속에 있었다. 나는 1중대 두사람하고 같이 그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같이 갈 때 까지 가슴에 달린 보찜과 손에 들은 보찜을 우리가 갔다 드리겠습니다”하고 짐을 맡아 동행하며 대화하니 남편도 군대에 갔다며 참아오던 울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였다. 어느 산 모통이를 돌아가는데 소 달구에 보따리 몇개와 주인 내외분이다. “어디로 피난을 가시느냐” 했더니 수원 좀 못가서 농촌 마을에 딸에게로 가는중이라 한다. 나는 주인한테 말했다. “여기 아주머니와 보따리 몇개 태워 달라”고 했다. 그리고 피난을 함께 딸에 집에서 해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했다. 노인은 쾌히 승낙했다. 우리 군인들은 그들과 헤어지면서 본인은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나의 손을 잡고 우는 것이다. 우리는 당황했다. 군인들은 다시 후퇴에 행군을 시작했다. 그 여인은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한다.

거기서 멀리 보이는 후퇴 부대가 보이는데 논두렁으로 오는 모습이 1중대장 모습이였다. 우리 셋이서 기다렸더니 정말 1중대장(     )이였다. 중대장을 대면하면서 “황중사 어디로 도망치다 왔나 도망자는 감옥에 가두워야지” 그러면서 손을 내밀려 악수를 청한다. “수고했다. 황중사”한다. 나는 “도망자는 감옥에 가야 하는데 중대장님 하고 같이 가면 되겠네요” 하니 모두가 한바탕 웃어댔다. 그러면서 또 한 산 모통이를 돌아서 가니 거기에는 어느 소속인지 소령 한분이 산발적으로 후퇴하는 군인들을 잡아 임시 재편성을 하고 배치하고 있었다. 중대장은 소령하고 지휘부(指揮部)를 구성하고 있으며 나는 3소대에 편성되어 옆에 무명고지로 갔으나 거기 벌써 인민군이 와 있었다. 적군은 우리를 발견하고 공격을 개시한다. “적은 실탄이 없다 돌격 앞으로” 소리치는데 여자의 음성이었다. 그런데 국군은 실탄 공급도 부상자 처리도 식사문제도 없다. 나는 “소대장님 후퇴를 하면 어디까지 후퇴를 합니까. 여기서 생명이 끊어질 때 까지 싸우다 죽지요” 했다. 소대장(    )은 “다 이런식으로 죽으면 나라는 누가 찾아주나”하며 “나를 따르라” 한다. “소대장의 명령이다” 외친다. “황중사도 분대장(소대장)을 따르라 후퇴하라” 소리쳤다. 소대원은 누구나 눈물을 닥으며 따라 주었다. 후퇴하면서 11중대가 많이 모여 수도경비사령부 18연대 3대대 11중대로 재편되었다. 잠시 쉴틈도 없이 포항 안강 기계에 투입되였다. 낮이면 아군 밤이면 적군 세상이 되었다. 아군이 신병 보충 받아 야간이 되면 인민군이 와서 “신병 집합”하는 소리를 치며 정신이 없는 아군 신병들을 몽땅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주일을 견디다 미군에게서 화염방사기라는 신무기가 도착하여 기계전투에서 사용했다. 기계 마을 뒷산은 솔나무 야산인데 일제히 화염방사기로 불을 질러버려 연기로 인해 도주할 방향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다 불에 타서 전멸시키고 북진을 시작했다.
4. 사랑하는 연인과 북한에서 조우

화장품 장사 늦은 밤 홍재수 보는 장사네. 오늘 밤은 갈등 빛이 길을 밝혀주니 가로등 빛의 덕 좀 보자는 생각이 든다. 이젠 장사 고만하고 잠을 자야지. 앗! 저기 가는 사람 어디로 갈까. 거리는 모두 불을 끄고 어둔 밤 마침 이리로 향하는 나의 손님이 되였다. 나만이 불켜 놓은 가게집에 그 손님이 왔다.

“조은 놈으로 미향수 하나 크림 하나 명색분 하나 내놔 보세요” 남자의 소리에 “이건 좀 그래요” 여자에 소리였다. 처음에 조은 상품 내 노면 대개가 좀 나은 것으로 주세요. 여자에게 생색내느라 의례 하는 남자의 소리에 여자는 조타고 한다. 그때 미국 값이 싼 미제를 안칠역에서 꺼네 미제 최고 값을 부른다. 여자는 “이것으로 사지요” 여자의 소리에 남자는 끄덕 끄덕 하며 값을 치른다. 오늘도 하루의 일당을 여기서 벌었다.

“필순 씨 오늘은 좀 늦었어요.” “딴대 볼일이 있어서요. 엄마가 좀 보자 하시네요.” “내가 벌써 가 뵈었어야 할 것을 필순 씨 미안해요.” 어머니는 나에게 “우리 필순이 잘 돌봐 달라”신다. 나는 고향 동창 두사람과 같이 군대를 가기로 약속을 했다. 필순 씨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챙기며 가장에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군대 가서 어느 토요일 외출하여 필순 씨 집으로 찾아갔다. 어머니도 만나고 필순 씨와 함께 했던 것이 끝이였다. 황해도 출신으로나와 동갑으로 참 착한 사람이였다.

6.25전쟁이 난후 나는 쫓기는 군인 생활에 익숙한 군인이 되었다. 수도사단은 함흥을 점령후 계속 북진 하던 중 청진(淸津)을 내려다보이는 어느 깊은 산 고지에 도착한 나는 휴식이 필요했다. (1950년 늦가을) 그 때 옆 산 능선에 인민군이 나타났다. 우리가 정탐한 결과로는 비무장에 위생병들이였다. 그 곳에 중화기 사격을 집중하고 손들고 귀순하라 요구했다.

왠일인지 우리의 요구에 따라 귀순해 왔다. 인원은 23명 모두가 여자들이었다. 나는 질문했다. “무기도 없이 여기 위생병이 어디에 필요해 왔느냐” 대답이 없다. 이 적 병사를 하나씩 나무에 묵어서 총살하라 했다. 나무에 하나씩 묵는데 거기엔 이필순(李必順)이도 있었다. 이럴수가 나는 모른채 하고 이 여자만은 여기에 대기시키라 하면서 물어 볼 것이 있다. 여자는 첫눈에 알면서 모른척을 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이필순이가 아니냐” 하니 덥석 나에게 안기어 말한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당신을 봤으니 나는 죽고도 이제 한이 없다”하면서 내 뺨에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닥아 주었다.

서울 여학생 22명을 후송 시키고 필순이 하나만 데리고 있겠다 싶어 연대장에게 승락을 얻었다. 그 때 우리 국군의 형편은 장교나 상사급만 돼도 사무 일병 하나씩 데리고 다닐려면 데리고 다닐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이등상사(18연대 3대대 11중대)로 교육계였다.

아군복으로 가라 입히고 모자도 아군 모자를 쓰니 국군이 되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어느날 개학을 하니 학교로 나오라 한다. 개학날에 참여한 학생 전원을 차에 태워 북으로 밤길을 달렸다. 어느 곳에선가 군복으로 가라 입혀 인민군이 되었다는 것이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나에게 말해주었다.

7. 성진 부두 탈출 및 영원한 그리움

부대는 성진을 향해 후퇴하는데 끝에는 이북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많은 무리를 지어 따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성진 부두 앞 바다에는 군함들로 가득 채웠다. 북에 젊은이들 군함에 태우는 부모의 떨리는 목소리로 “죽지 말아라 죽으면 안 된다”며 울부짖는다. 자식들은 “살아계시라요 어머니요” 하는 애처러운 안타까운 소리에 성진 부두는 울음 바다가 되었고 갈매기도 같이 울어 데드라.

한편 미군 군함 근무자들은 고향에 가져갈 선물 마련에 분주했다. 국군이 적으로부터 노획한 권총 등이다. 나도 중국군 권총 하나를 팔아 고향에 갈 때 여비로 쓰라고 필순이에게 주었다. 이렇게 해서 군함편으로 무사히 부산에 도착 하선했다. 하선 한 부대는 화천 방면을 목적지로 원주에서 기차편으로 북진했다.

나와 너의 연인 사이의 인연은 여기까지로 하고 먼저 집으로 가는 사람이 문에 사람인 자(人)를 써 놓고 기다리기로 굳게 약속을 다짐하면서 이별의 아픔을 씹었다. 3사단 일등상사로 대구의 제27육군병원에서 다리의 상처를 치료하고 제대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집은 종로 화신백화점 뒤편에 있는데 전쟁 때 파손이 아니된 옛 모습 그대로의 집이였다. 열 번 스무번 100번 집에 와 봐도 사람인 자(人)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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