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left

 

 Freeboard
자유게시판

작성자 이상묵 시인
작성일 2019/03/25 (월)
첨부#1 우성_박용만_선생님을_추모하며(이상묵).hwp (15KB) (Down:2)
ㆍ조회: 35      

우성 박용만 선생님을 추모하며...

                                                         우성 박용만 선생님을 추모하며

                                                                                                                                              이상묵 시인

존경하는 박용만 선생님,
선생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신지도 벌써 90년의 세월이 흘러갔군요. 하지만 의인의 피는 결코 마르는 법이 없어 오늘날 저희 가슴 속은 물론 자자손손 그 흐름을 멈추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존경하는 박용만 선생님,
선생님에 대한 저희들의 그리움도 세월을 거슬러 퇴색을 거부하리라고 믿습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5년전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보호국이 되자, 뜻있는 지사들은 국운이 다한 것으로 알고 해외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만주와 러시아 의 연해주와 미주 각지로 뿔뿔이 흩어진 동포들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왕좌왕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최초로 독립운동의 나침판을 하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각지의 대표들이 모여 연대를 구축하고 앞으로의 실천방안을 수립하기 위한 회의를 조직하였으니, 그것이 저 유명한 애국동지대표회인 것입니다. 애국동지대표회는 독립운동을 주제로 세계 한인 대표들이 최초로 공식회의를 열었다는 점에서 대한독립운동사의 출발점이라고 공인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1908년 7월 11일, 콜로라도주의 덴버에 있는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회에는 연해주의 동포들도 거액의 성금을 모아 보내며 위임된 대표들을 보냈고, 뉴욕을 비롯 미국 각지의 대표들도 달려와 30여명이라는 성원을 이루었지요.

앞으로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과 일부 유학생들이 여름방학기간 동안 군사훈련을 받는 것을 의결하였으며, 애국동지대표자회가 끝난 후부터 그간 분립됐던 단체들이 통합에 나섰고, 러시아와 만주는 물론 미주와 하와이 거주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세계적인 자치기구인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해 나가게 됩니다. 그때 조직의 이념적 기반과 강령들을 기초한 분이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대한제국이 망할 당시 민도는 낮고 정치학이나 경제학 같은 학문은 허허벌판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만이 유일하게 일본과 미국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셨고, 마치 광야의 외로운 선지자처럼 앞길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간 부정과 왜곡된 역사에 묻혀 선생님의 고귀한 뜻과 투철한 애국정신이 극히 일부마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역사의 연속성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미주이민사에서도 선생님은 훌륭한 뿌리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우리들은 한국과 미주에서 더 조명되고 사랑받는 선생님이 되실 것을 믿어마지 않습니다.

※이상묵 시인의 추모사로 홍순관 목사가 철원읍 중리 생가 터에서 열린 우성 박용만 선생 서세 90주년 기념식(2018.10.17)에서 대독했다. 이상묵 시인은 독립지사 박용만의 불꽃 같은 삶을 그린 장편소설 ‘칼의 길’을 남기고 그해 11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bot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