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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탄강댐 건설반대 철원군대책위원회 [관련기사]
     
 
이름: 경향신문
2004/1/12(월)
[한국사 미스터리]철책선 너머 궁예도성  
◇영원한 평등세계를 지향한 궁예=“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퇴하였기에 평양 구도(舊都)는 묵어서 잡초만 무성하니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삼국사기 궁예전)

철원(구철원·896년)에서 송악(898년)으로 천도한 풍운아 궁예는 901년 외세(당)에게 허망하게 멸망한 고구려 재건의 기치를 든다. 나라이름을 고려라 하고 성을 고(高)씨로, 활 잘 쏘는 주몽의 후예라 하여 이름을 궁예(弓裔)로 고쳤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이제 고구려에 머무르지 않는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로 칭한다. 1년 뒤에는 다시 철원(구철원에서 30리 북방인 풍천원 벌판)으로 옮긴다. 마진은 ‘마하진단’의 줄임말이다.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말한다. 결국 궁예는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백제,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까지 아우르는 ‘대동방국’의 건설을 꿈꿨던 것이다. 철원 재천도 이후 청주인 1,000호를 이주시킨다. 궁예가 이토록 청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해가자 ‘고구려만의 부흥 세력’의 박탈감은 컸다. 황해도와 경기북부의 호족들은 왕건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결국 궁예를 몰아내고 만다(918년).

당초 궁예는 “사졸들과 함께 고락을 하고, 사사로움이 없었으며 뭇사람들이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했다”(삼국사기)는 평을 들을 정도로 높이 평가됐다. 하지만 역사의 패배자가 된 그는 의처증에 시달려 달군 무쇠방망이로 부인의 음부를 쳐서 죽인 정신병자로 폄훼됐다. 과연 그럴까. 궁예는 911년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으로 바꾼다.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뜻이며, 봉(封)은 봉토의 뜻이다.

결국 궁예는 국호를 통해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세계’, 즉 대동방국의 건설을 염원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상 이같은 웅지를 품고 동방을 한꺼번에 아우르겠다는 야심찬 국가건설 목표를 세운 이가 있었을까. “비겁한 자의 친구가 되는 것보다 정직한 자의 원수가 되는 편이 더 낫다. 독사와 전갈은 피할 수 있지만 비겁한 인간은 피할 수 없다”고 설파한 궁예의 진면목을 살펴야 하지 않을까.

◇군사분계선을 반으로 나눈 도성=“어마어마한 들판이었어요. 궁예왕이 왜 도읍지로 이곳을 택했는지 금방 이해가 됐어요.” 지난 2001년 5월 궁예왕의 야망과 좌절이 묻어있는, 강원 철원군 풍천원 벌판을 답사한 이재 육사교수의 회고다.

궁예도성은 어쩌면 그렇게 ‘슬픈 궁예’를 닮았을까.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 된 궁예도성. 1917년 일제가 작성한 지도와 51년 찍은 항공사진, 91년 재작성한 지도를 토대로 보면, 도성은 군사분계선을 거의 정확히 반으로 나눠 반쪽은 북한, 반쪽은 남한 땅이다. 그것도 모자라 서울~원산간 경원선 철로가 동서로 도성을 잘라 놓았다. 도성은 동서로, 남북으로 잘린 애처로운 형국이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방한계선 안으로 들어가 궁예도성을 조사한 이재씨의 말.

“수색대의 인도에 따라 좁디좁은 수색로를 걸으며 도성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았어요. 너무나 평화로운 들판의 광경. 고라니가 바로 코 앞에서 뛰놀고…. 깜박 달려가 안고 싶은 충동을 느껴 견딜 수 없었어요.”

그러나 좁다란 수색로에서 한발짝만 벗어나도 언제 지뢰가 터질지 모른다. 1,100년이 지나도록 버려진 땅이 된 궁예의 옛터는 이제 딱 반으로 쪼개진 남북분단의 아픈 상징이 되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일제시대 자료를 보면 궁예도성은 외성이 무려 12.5㎞, 내곽성은 7.7㎞에 달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성백제의 풍납토성(전체 둘레 3.5㎞), 신라의 경주 월성(1.8㎞), 고구려의 국내성(2,7㎞)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니 궁예의 대동방국 건설이 얼마나 야심찬 프로젝트였는지 알 수 있다. “~오히려 궁궐만은 크게 지어~힘든 일은 끊일 새가 없으니 원망이 일어났다”(고려사)는 왕건의 평가는 궁예도성의 규모가 컸고 백성들의 노역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2001년 조사결과 성벽의 대부분이 붕괴되긴 했지만 그래도 도처에서 잔존부분이 확인됐다. 남대문지는 아카시아 군락을 이루고 있는 채 확인됐고, 경원선과 외성 남벽이 만나는 지점은 높이 1m, 길이 50~60m의 성터가 남아 있었다. 외성남벽 서쪽 부분에는 길이 20m, 하단 폭 6~7m, 높이 3~4m의 토성이 확인됐고, 내성남벽의 경우 길이 400~500m 정도의 토성이 연결됐다. 외성동벽은 130m 가량이 남아 있었는데 가장 확연했다. 하지만 온통 지뢰라 더이상의 조사는 어려웠다.

앞으로도 확인할 게 너무 많다. 북한쪽, 이른바 삼방(三防)의 협곡에 남아있을 궁예왕릉은 물론 외성의 남대문지, 궁궐터, 미륵전, 궁궐터와 남대문지 앞에 쓰러져있다는 석등 2개(일제시대 국보 118호)와 봉상리에 있다고 알려진 귀부 등….

◇궁예성 남북공동발굴은 통일의 시금석=지난 2001년 7월 평양에서 남한의 강원도 철원군이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에 경운기 100대를 전달하는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이 교류에는 더욱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지방자치단체로서는 처음으로 군사 분계선의 남북에 걸쳐 흔적을 남기고 있는 궁예도성의 공동발굴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 도성의 공동조사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민족의 동질성을 찾기 위해서는 정치·경제분야뿐 아니라 고고·역사학계에서도 남북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교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가장 상징적인 유적이 궁예도성인 것이다. 궁예가 애초에 고구려의 계승을 내세웠고 따라서 나라 이름을 처음에는 고려로 정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는 현 북한정권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궁예도성의 공동발굴은 남북 화해의 시금석이 될 것이고 나아가 비무장지대의 성격을 바꿈으로써 앞으로 통일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문제를 남북이 함께 풀어가야 한다면 궁예도성 발굴은 그 문제를 푸는 첫번째 단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궁예왕이 이미 9~10세기에 고조선·숙신(만주 및 연해주)·고구려의 옛땅을 반드시 수복해야 할 ‘우리 땅’으로 보았다는 것을 남북공동연구로 알려야 한다.

이미 금강산 육로관광까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서울~원산간 경원선도 다시 연결될 게 분명하다. 만약 경원선이 기존의 노선(궁예도성을 잘라버린)대로 복원된다면 궁예도성은 다시 한번 우리 손으로 파괴하는 꼴이 될 것이다. 이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조유전/고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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