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철원 선교 사업
철원읍은 본래 장로교회에서 선교를 시작했기 때문에 1901년 하디 선교사가 원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며 전도할 때 철원읍을 지나 지경터, 금화, 간성, 양양 등지에 교회를 세웠고, 지방회를 조직할 때 지경터 지방회라 했다. 지경터의 위치는 철원읍에서 6Km(15리) 정도 동남방에 내려가 있는 농촌이었다.
그 후 감·장이 선교지역을 분할할 때 철원읍이 남감리교회 지역으로 편입되어 1909년에야 비로소 남감리교회에서 이화춘 전도인을 파송했다. 그후 이화춘 전도사는 철원읍 장로교인을 인수한 후 항일 민족주의자였던 애국자 조종대(趙鍾大) 씨의 약국 마루에서 30여 명의 교인이 모여 창립예배를 보았다.
1909년도 연회록에 의하면 서울 송도 지방(감리사 저다인) 지경터 구역장 하디, 구역 전도사 이화춘으로 되어 있다. 이화춘 전도사는 지경터 구역장의 임명을 받아 철원읍교회를 창립했는데 이는 곧 철원읍교회는 지경터구역 소속으로 창립되었다는 것이다.
1911년에는 철원, 평강, 김화, 금성 4구역 34개 교회도 지경터 지방을 조직했다.
1917년 철원지방에 파송된 교역자는 철원구역박연서, 평강구역 미파, 김화구역 전재풍, 창도구역 강재희, 금성구역 미파로 되어 있다. 감리사겸 5개 구역 관할 목사는 히치(J.W. Hitch, 許雅各)가 담당했고, 틴슬리 양(Miss H. Tinsley)이 여성사업, 이화춘이 지방순회 전도사업을 맡았다. 1918년에 철원지방은 다시 서울지방에 소속되었다.
그 후 미국해외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미국 선교 본부로부터 경제원조를 받아 철원지역에 대거 투자했다.
그 때 전곡교회, 안골교회, 연천교회, 철원읍교회 등이 건축되었고 1921년에 비로소 앤더슨 의사(E.W. Anderson M.D 安烈) 부부와 어윈 양(Miss C. Erwin, 魚源), 무스 목사 부부 등 선교사들이 철원에 주재하며 남선교사들은 전도사업에 여성교사들은 여자야학, 유치원, 재봉강습회, 요리강습회 등 여자 계몽사업에 주력, 선교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남감리조선연회에서도 1924년 철원지방을 독립시킨 후 장로사로서 양주삼(梁柱三)이 취임하여 선교사업을 더욱 확장해 나갔다. 1917년 철원, 철원서, 김화, 금성, 평강 등 6개 구역에서 24년에는 창도, 철원, 철원서, 김화, 금성, 평강, 삭녕, 연천, 영평 등 9개 구역으로 확장시켰다.
<표 3> 철원지방 교세(1917)-생략
4. 한국 선교사업과 관서지역의 특수성
1) 감·장의 선교지 분할
한국 기독교(개신교)의 성장률은 세계 선교사상 유래가 없는 폭발적인 성장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 선교에 있어서 남한 교회(감·장·성 등)의 성장률만 해도 일본, 인도, 멕시코 들에 비해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관서지역 교회의 성장률을 본다면 그야 말로 폭발적인 성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가리켜 언필칭 한국 장로교회가 선교정책으로 채택한 네비어스 방법(Nevius Methods)때문 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북한 교회사를 다루고 북한 교회 재건을 논하는 자리라면 선교사상, 관서지역과 관서 민중의 특수성을 한 번쯤 생각해 보고 지나가야 하리라. 그러면 한국교회 선교사상에 있어서 관서지역의 교회 성장률은 어느 정도 였을까? 표4는 서명원의 「한국 교회사」(대한 기독교서회, 1911)에서 발췌한 한국교회 성장률이다.
<표 4> 한국교회 성장률
위 표에 의하면 호주, 카나다, 북장로회 등 3장로회가 선교정책에 있어서 '네비어스'라는 동일 정책으로 선교사업을 진행했는데 왜 황해·평북·평남 3도에 만이 성장율이 월등이 높고 경기, 함남, 경북지역의 성장률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을까?
그것만이 아니다. 캐나다 장로회는 함남북이라는 넓은 지역을 차지했고 호주장로교회는 부산, 마산, 진주 등 경남 남부지역을 선교지로 한 후 네비어스방법을 도입했는데 왜 나중에 들어와 지역적으로 열악한 강원 북부지역에서 일한 남감리교회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고찰해 볼 때 관서 3도의 교회 성장은 네비어스 선교정책에 있다기 보다 황해·평북·평남 3도에 어떤 특수성에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또 아래와 같의 예도 있다. 1929년도 서울지역 감·장의 교세를 소개한다.
<표 5> 서울지역 감·장 교세성장표
1. 미감리교회
위 표에 의하면 감·장은 1885년 한 해에 들어와 1929년까지 44 년간을 같은 기간과 같은 지역에서 전도사업을 펴왔는데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채용하지 아니한 감리교의 교세는 네비어스방법을 채택한 장로교의 교세보다 앞서면 앞섰지 뒤떨어지지 않는 상황에 있다. 특히 새문안장로교회보다 1주간 늦게 창립된 정동제일감리교회는 교인수에 있어서 또는 재정면에 있어서 앞서고 있다.
요컨대 기관사업에 주력했던 감리교회가 교회사업에 힘썼던 장로교회보다 앞선 수준에 있다는 것이 도표2의 상황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관서 3도 교회 성장률은 네비어스 선교정책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관서 3도가 지닌 어떤 특수성을 발견하고 그 특수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 관서 3도의 특수성
서명원은 그의 저서 「한국 교회사」에서 관서 3도민들의 특수성을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첫째, 북한인은 남한인 보다 좀 더 개화되어 있었다. 한글은 물론 한문을 배운 이가 많았고 배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인은 대개가 한문은 물론 한글조차 배우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둘째, 남한인은 유교사상에 사로잡혀 있어서 새로운 사상에 거부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 수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북한인은 개방적이다.
셋째, 남북한인의 경제적 차이가 심하다. 즉 남한인들은 농노형태의 소작인들이 위세 당당한 양반계층의 지주밑에서 허리를 굽히고 아첨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양반과 지주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민중계층은 좀더 기독교로의 개종이 어려운 상황이다.
반면 관서인들은 대개 자립적 중산층 즉 중소지주 자작농과 상인들이어서 양반이나 지주의 위세에 눌림없이 일종의 자유인에 속한다. 더욱 북한은 전답보다 산이 많은 지대여서 일찍부터 중국 무역에 힘썼고 국내에서도 상업에 종사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매이지 아니하고 살아간다.
중소지주, 자작농, 상업인들은 개화의 물결을 타고 들어오는 서구의 현대문화가 모두 기독교 사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자립으로 교회를 건축하고 교역자의 생활을 부담하며 유지비를 거출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적극으로 종교활동을 벌인 것이 관서지역의 특수성이라는 것이다.
넷째, 더욱 정치적 상황이 북한인들을 기독교로 들어오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 1,400명 중 서북 출신이 1,350명인데 그중에 평안도인이 80%, 함경도인 20%라는 것이 하바드대학 와그너(E. Wagnar) 박사의 주장이다.
그런데 평안도 출신 과거 합격자가 1,000이라해도 쇄도정치하에 있던 한국 정부여서 정치인들이 이끌어 주지 아니하여 벼슬에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에 불만을 품은 관서의 선비들이 장래에 빛을 보자는 데서 현대문화의 모체가 되는 교회로 물밀듯 들어왔다는 것이 관서에 교회 성장률을 높인 원인이라는 것이 이광린 교수가 "개화기 관서지방과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바다.
요컨대 남한인은 농노정도의 생활이어서 자유가 없고 폐쇄적인 반면 북한인은 중상층 자유인이고 경제적 여유가 있고 개방적인 데다 정치적 불평 등에 관한 심리상태가 기독교를 환영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3) 관서 선교에 대한 감리교회의 정책
위에서 보는 대로 관서지역이 선교의 황금어장이라면 왜 감리교회에서는 일찍부터 관서지역에 힘을 쓰지 아니했을까? 물론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1) 감리교는 본래 기관사업에 치중하였고 2)배재, 이화, 문서, 의료 등 이미 시작한 사업에 인적자원을 배치하다 보니 자연 북한으로 보낸 선교사는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장로교회에서는 본래 교회사업에 치중하기 위해 기관사업에 힘쓰지 아니했고 또 처음부터 평양에 마펫, 스왈른, 그레이, 함리 들을 보내 관서지역 선교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 후 북장로교회에서는 선교사를 증원시켜 서북지역으로 많은 수를 보냈다. 그러나 감리교회에서는 한국에서 요구하는 대로 선교사의 증원을 충당해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장로교 4개 교파와 감리교 2개 교파가 선교지를 분할했다. 분할의 원칙은 아래와 같다.
① 이미 교회를 개척한 지역은 개척한 교파에 기득권을 인정해 주며 두 개 교파에서 같이 교회를 개척한 지역은 교회가 많은 교파에 양도한다.
② 선교사의 수 1인당 한국인(선교 대상자)을 같은 수로 할당하는 선에 서 분할했다. 선교사의 수가 많으면 선교 대상자의 수 도 많이 배당 되므로 선교지역도 넓게 차지하게 된다.
③ 서울, 평양, 원산은 공동구역으로 한다.
그러므로 관서지역에도 선교사의 수가 많은 교파와 1907년 이전에 이미 교회를 많이 설립한 교파에게 넓은 지역이 돌아간다.
그러면 선교지를 분할하던 1907년 장·감의 선교사 수는 얼마였을까? 장로교회 4개 교파에 선교사의 수 101명이었고, 감리교회 2개 교파에 선교사는 55명이었다. 도표 6에 선교사 수와 활당된 선교대상자의 수가 잘 나타나 있다.
5. 3·1운동
1919년 3월 1일 명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제창으로 시작된 조선독립운동 시위는 19년을 지나 20년까지 계속된 민족적인 독립운동이었다. 1919년에 독립운동이 발원된 이유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약소 민족자결주의와 고종의 붕어 독살설에 대한 민족의 의분에 두고 있으나 결국은 독립염원에 대한 민족적 염원이 그 원인이 된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모여 선택한 것으로서 천도교인 15명, 불교인 2명, 기독교인 16명으로 모두 33명이다. 기독교인 16명 중에는 장로교 7명, 감리교 9명이 선발되었는 데 9명 중에 당시 북한 거주자는 해주의 최성모 목사와 평양 신홍식 목사였다.
3월 1일 서울의 시위와 같은 날에 일어난 지방시위는 개성, 평양, 원산, 선천, 안주, 의주, 진남포 등이었고, 그 밖에 전국 각지에서 시작된 시위는 1년을 두고 계속되었던 것이다.
한편 3∼4월에 시위가 1,214회(연인원 110만명) 있었는 데 그 중에 주도 세력이 분명한 311지역을 보면 기독교가 78지역에서, 천도교인이 66지역에서, 기독·천도 합동으로 벌인 운동이 42지역에서 주도하였다. 이는 당시 인구의 2%내외가 되는 기독교인이 각지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증거이다. 그처럼 기독교가 큰 역할을 했던만큼 피해도 컸다. 수감인원의 16.2%, 기소인원의 21.4%, 불기소인원의 11.7%, 체포자의 49.3%가 예수교인임이 확인된다.
또는 소각된 교회당 59처, 일부파괴 24처, 기독교학교 교사 3개교가 불탔으며 기독교인의 가옥으로 제암리 수천리 두 마을에서 불탄 가옥만도 70호(?) 가량 된다. 1919년 6월 30일 현재 투옥된 교역자 수가 151명이며 그 중에 사망자가 감리교회만도 근 30명이 된다.
한편 역사가 박은식에 의하면 전국에서 시위 횟수가 1,542회 참가 연인원 205만명으로 잡고 있으나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에서 발행한 「독립운동사」에는 110만명으로 기독되어 있으며,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들은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사망자 중에는 감리교회 박석훈, 유관순을 비롯하여 제암리교회의 사망자 22명은 분명하나 전체 사망자 7,509명 중에 기독교인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체포, 옥고를 치른 사람들도 민족대표 33인중 감리교 9명을 비롯하여 수원의 김지환 등 수없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평양지방 감리사 보고에 보면 "본 지방회를 개최하려고 할 때에 조선 목사 한 사람이 말하기를 금년 지방회는 감옥에서 개회하면 좋겠다고 했다.
감옥에 목사, 전도사, 권사, 속장, 학교 교사, 주일학교 교사 등 합한 수가 160인이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지방에서 160인이 구속되었다면 전국 감리교로 말하면 천 명이 넘을 것이다. 각 지역에서 시위를 주도한 단체와 개인이 교회가 많았던만큼 기독교인의 사망자 수는 수백 명에 달할 것으로 추리된다.
6. 조선 감리교회 창립과 서부연회 조직
1) 교회 제도의 조직 - 남북감리회의 제도조직과 발전
1885년에서 1900년까지는 조선 전체를 조선지방으로 삼았고 1901년에는 조선을 3지방으로 분할할 때 북한지역 전체를 조선북지방으로 조직했다. 1905년 남쪽을 경기지방과 경기서지방, 북한을 평양지방과 영변지방으로 나누었고 조선선교회를 조직했으며 1909년에는 남쪽을 서울지방 수원지방, 충청남지방, 충청북지방으로 나누고 북쪽을 평양 영변 등 모두 5개지방으로 완전한 연회를 구성했다.
남감리교회의 연회조직은 다음과 같다. 1896년 선교초기에는 중국선교연회 조선선교지방으로 중국에 소속시켰다가 즉시 외형으로는 중국선교회에 소속시키되, 내용으로는 서울구역과 개성구역으로 조선선교회를 독립시킨 후 제1대 관리자 리드 박사가 취임했다. 1914년 선교연회가 조직되고 1918년 조선연회가 조직되어 완전한 연회를 이루었다.
2) 서부연회 조직
1930년 12월 남북감리교회를 합동하여 조선감리교회로 창립총회를 열고 교리 헌법 규칙 등을 제정한 후 제1대 총리사 양주삼 목사를 선택했다.
이로써 조선감리교회는 자치교회로 새 출발했다. 1931년 6월에는 개성북부교회에서 제1회 연회로 모여 조선교회를 중부, 동부, 서부 등 3연회로 나누어 조직했다. 1939년도 연회에 소속된 지방수를 소개한다.
가. 서부연회 : 영변지방, 평양지방, 진남포지방. 해주지방, 사리원지방,
강서지방
나. 동부연회 : 원주지방, 춘천지방, 강릉지방, 원산지방, 철원지방,
경동지방
다. 중부연회 : 평천지방, 개성지방, 경성지방, 경성남지방, 인천지방,
수원지방, 이천지방, 천안지방, 홍성지방, 공주지방
라. 현 서부연회 : (휴전선 이북) 연변지방, 평양지방, 진남포지방,
해주지방, 강서지방, 사리원지방(이상 원 서부)
원산지방, 철원지방(이상 원 동부)
평천지방, 개성지방(이상 원 중부)
위에서 보는 대로 휴전선을 경계로 한 후 남북의 지방수를 계산한다면 북한지역(서부연회) 지방수 10개처 남한지역(동부, 중부연회) 지방수 10개처로서 남북이 반반으로 동 수가 된다.
교회수에 있어서도 남한이 구역수 105처요, 교회수 411처이며 이에 비해 북한(서부연회)은 구역수 119처요, 교회수가 392처가 된다.
다만 서부연회 지역에는 남녀 고등학교 6개교가 있는 데 비해 남한에는 남녀고등학교 4개교 감신과 이화전문이 있고 감리교 본부(총리원)가 있으며 의료기관만도 북에 4개처(원산 구세 해주구세요양원 개성남성 평양기독병원)와 연합 1개처가 있는 반면 남에는 2개처 (동대문부인병원 세브란스)와 연합 1개처가 있을 뿐이다.
3) 일정말년의 서부연회
일정말년 감리교회가 당했던 수난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종래에 지녔던 구미 교회의 사상과 제도와 규칙을 전면 폐지하고 순 일본감리교회의 제도를 도입한 것이요.
둘째, 감리교회 개혁을 반대하는 교역자와 평신도는 모두 제거된 것이며,
셋째, 일제의 비협력자는 사법처리로 옥고를 치르거나 순직 순교케한 사건 들이다.
여기에서 간단히 기록코자 하는 것은
(1) 연회와 지방회가 해산되고 교구제로 개혁한 점. 종래의 3부 연회와 22개 지방은 폐지되고 도행정구역을 따라 교구로 재조직 되었다. 즉 강원동교구, 강원서교구, 충청교구, 경기남교구, 경기북교구, 경성교구, 황해교구, 평안동교구, 평안서교구 등 10개교구로 편성되었는 데 이에 오는 서부연회에 소속되는 교구는 아래와 같다. 평안동교구, 평안서교구, 황해교구, 강원동·서교구에서 반반 정도 경기북교구의 일부 등이다.
(2) 신학 및 신학교육의 변화
구약폐지 신약에서도 4복음을 정경으로 삼는다.
신학교 교육에도 4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사상 예수의 생애 복음서주해 등이 있을 뿐 신도사상(神道思想), 국체의 본의 (國體·本義), 유교(儒敎), 불교(佛敎), 일어(日語), 교련(敎鍊) 들을 넣고 있었다.
이에 반해 평양요한학원, 평양고등성경학교, 만주시학교의 교과목은 종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즉 신구약개론, 신구약주해, 조직신학, 교리사 및 교리, 기독교교육, 교회사, 설교학, 목회학, 철학, 종교심리학, 음악 등이다.
(3) 반일 반개혁자들의 수난
반일 성향이 있는 교역자나 평신도는 사법당국에서 처리한다. 설교 사건으로 민족주의 경향으로 수난 당한 교역자들이 있다.
회양교회 담임자 권원호, 영변지방 황국주, 철원지방 강종근 들이 순교하였고 홍현설, 이진구 들이 각각 8 개월, 2년 8 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들이 모두 현 서부연회에 소속된 교역자들이다.
감리교 개혁에 반대편에 섰다가 정춘수 통리로부터 고발되어 형을 받은이와 교직에서 해직, 파면당한 이도 50여 명이 넘는다.
서부연회 출신 교역자로 정일형 송충국 전진규 들이 옥고를 치르고 나왔으며 명란조 이윤영 이환신 박세광 배덕영 박영환 홍현설 이정렴 서기훈 등이 구속되었다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