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강원도민일보
2004/7/2(금)
[7월문화인물] 상허 이태준(철원)  
<7월> 상허 이태준(철원)
이태준이 월북후 찍은 사진으로 뒤로 을밀대와 대동강이 보인다.

월북작가 굴레… 재조명 시급한 천재문인

 소설만을 가지고 그를 평가할 때 그는 한국문학 100년사에 가장 뛰어난 작가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문학가로만 보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는 그가 바로 월북작가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반도 화해무드가 고조되면서 지역정서에도 변화가 이루어 졌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민영시인을 비롯한 범 문인들이 참여하는 상허 이태준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발족돼 추모사업이 추진되는 등 지역 내에서도 그를 추모하는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태준이 여름이면 서울서 내려와 망중한을 즐기던 한내천과 교각만 남아 있는 한내다리.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을 실어 나르던 열차가 금방 지나갈 것만 같다. 철원/이주섭

30년대 순수문학 기수…이념 희생양 불구 논의 안돼

■ 이태준의 생애 작품세계
 

상허 이태준 선생은 철원군 묘장면 용담(현 대마리 4반) 출신으로 한국 단편문학의 완성자로 추앙 받는 작가다.
 

그러나 월북작가라는 굴레에 가려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방치 돼 왔던 냉전시대가 낳은 또 다른 한 희생양이기도 하다. 지난 1988년 정부의 월북작가 해금조치가 단행되면서 그에 대한 족쇄가 풀려 학계의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괄목할 만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철원지역 문인 모임인 철원문학회를 중심으로 소극적 형태의 추모사업이 이루어져 왔지만 수복지구 특유의 반공 이데올로기 정서에 부합되지 않아 외면당해왔다.

하지만 최근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는 등 한반도 냉전종식을 위한 화해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지역정서에도 변화가 이루어 졌으며, 최근 그의 탄생 100주년 맞아 민영시인을 비롯한 범 문인들이 참여하는 상허 이태준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발족돼 문인비 건립 등 추모사업이 추진되는 등 지역 내에서도 그를 추모하는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1930년대 뛰어난 미문장가(美文章家)였던 그는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촌뜨기, 어떤날 새벽, 돌다리, 해방전후등의 작품은 철원을 무대로 씌어져, 1930년대 철원지방의 사회상과 지명, 토속어 등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의 항일정신과 민족주의자로서 면모들은 지역 청소년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러나 아직도 지역 일부 원로들이 그의 월북을 문제삼아 선양사업에 극렬 반대하고 있어 그의 존재와 작품세계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생가복원, 문학비 건립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다.

■ 이데올로기 피해자 이태준
 

소설만을 가지고 그를 평가할 때 그는 한국문학 100년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임에 분명하다. '순수문학의 기수', '한국단편소설의 완성자' 등으로 불리며 한국문학의 황금기 1930년대 문학계를 좌지우지하던 사람이 바로 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문학가로만 보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는 그가 바로 월북작가이기 때문이다.
 이태준의 월북 이유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다만 월북 전 그가 한 발언과 작품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백철이 저술한 '문학자서전' 하권에 이태준이 해방 직후 문학단체 결성 준비모임에서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태준이 발언한 말로서 일본 놈 때도 출세하고 해방되어서도 또 선두에 나서려고 하다니… 이런 분자들을 빼지 않으면 이 준비위에 참석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그리고 면전에서 Y씨와 L씨가 지목되었다. 그때 Y씨가 한 말이 '정치인들에게 비기면 우리 문학인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다들 의사가 그렇다면 물러가지요'하고 퇴장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 발언에서 살펴보면 일제시대 친일적 행위를 한 문인들에 대한 비판에 대해 그는 매우 완강한 입장을 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그가 당시 친일행적이 있는 문인들과 정치인들이 건국사업에 주도적으로 나서는 행태를 인정할 수 없어 당시 친일파에 대한 숙청이 제대로 처리되고 있다고 알려진 북한으로 문학적 이상향을 찾아 떠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그가 남한에서 마지막으로 발표한 작품 '해방전후'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이 계급보다는 민족의 비애를 다룬 것이 더 많았다고 적고 있다.
 

공산주의를 회의적인 눈으로 보면서도 해방직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한 주된 이유 역시 단순한 계급혁명이 아닌 시민적 민주혁명으로 노선을 정했기 때문이었다. 상허는 진정한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월북 후 이태준은 '조선의 모파상'으로 추앙 받으며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결국 1955년 '부르주아적 반동 사상의 잔재성을 지닌 작가'라는 죄목으로 숙청되어 함남로동신문사 교정원으로 일하다 사망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리창을 닦는 정성으로 문장을 갈고 닦아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리고자 했던 상허 이태준.

 그가 보여 준 문학적 업적과 일제에 굴하지 않았던 고귀한 작가정신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월북작가라는 이유만으로 그 동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해왔으며 북에서도 결국은 숙청을 당하고 쓸쓸하게 죽어간 이태준은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것이다.
 

더욱이 슬픈 것은 고향 철원에서조차 외면을 당해왔다는 것이다.

 철원은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깊이 간직한 곳으로 주민들은 지금도 그 상처를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하여 고향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실향민과 인민군들에게 가족이 살육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지역주민에게 북은 오로지 적 일 수밖에 없는 지역 정서가 바닥에 깔려 있다. 그러기에 해금이 되었어도 이태준이 철원에서 환영받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젠 남과 북의 최고책임자가 만나고 이산 가족이 만나는 남북관계가 적대 관계가 아닌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언론 매체에서 이태준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다루어 나아가자 이제 철원에서도 상허에 대한 새로운 정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 동안 상허를 추모하는 상허문학회의 깊이 있는 학문적인 연구와 철원문학회에서 매년 상허 이태준 추모제를 지내면서 지역 주민에게 꾸준히 이태준을 알리며 문학적 업적을 기려 나간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처음 문학회에서 1995년 방치된 이태준 생가터를 찾아 표지판을 세울 때만 해도 작전을 하듯 몰래 들어가 급히 세우고 돌아서 와야 했다.

당시의 분위기로서의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98년 철원문학회 주도로 시작된 상허 이태준 추모제에서부터 시작된 이태준 알리기가 성과를 보아 이제는 철원의 많은 사회단체가 참여를 하며 상허 이태준 기념사업회의 설립 필요성이 공론화 되고 있다.
 

상허 이태준이 오몽녀로 문단에 데뷔한 7월 13일을 기념일로 삼아 지난해까지 3회의 추모제를 지냈으며 이제 철원의 문우들의 모임인 문학회를 벗어나 군민의 합의로 나아가 도민의 합의로 선양사업이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기념사업회에서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상허 백일장, 기념비 건립, 생가터 복원, 문학상 건립 등의 사업을 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한국이 낳은 자랑스런 소설가 이태준, 이데올로기의 피해자 이태준으로부터 작가정신을 계승해 분단의 상처 극복의 정신을 키워야 할 것이다.

철원/이주섭 dmz155@kado.net

 
김 준 수 철원문화원장

철원 배경 향토색 짙은 작품 친일요구 거절 과감히 절필

 철원 출신 소설가 상허(尙虛) 이태준은 1904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부친 이창하씨와 모친 순흥안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6살 때 러시아로 망명한 부친을 따라 블라디보스터크으로 갔으나 부친의 별세로 귀국하다가 함경북도 이진(배기미)에 정착한다. 9살되던해 이곳에서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천애고아가 되고 철원의 친척집에 맡겨져 자랐다.
 

독립운동가이며 사립봉명학교를 설립한 5촌 당숙 이봉하 선생 집에 기거하며 봉명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봉명학교를 마친 이태준은 18세 때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나 1924년 학교의 비리와 횡포에 맞선 동맹휴교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돼 퇴학을 당한다. 이 후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에 유학 상지대학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1925년 7월13일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면서 소설가로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청년기의 시절도 불운하여 결국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 길에 올라 '개벽'사에 입사해 어린이 대상 잡지에 수필 소년소설 등을 발표한다.
 

또한 '조선중앙일보'학예부장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한다.
 

이 무렵 비문화적 정치주의를 반대하고 예술성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던 '구인회'에 참가한 그는 몇몇 대학에 출강하면서 더욱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해 1939년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순수문예지 '문장'지의 편집자로서 신진작가를 배출하는 우리나라 문학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이태준은 고향인 강원도 철원의 금학산을 비롯한 산촌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을 다수 발표한 향토작가이다. '촌뜨기'(1934년) '농군'(1939년) '돌다리'(1943년) 등 의 소설에 등장하는 새술막, 떡전거리, 월정리, 한내다리, 선비소, 밤가시 등은 철원의 지명과 그 당시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상허 이태준은 작가로서의 탄탄한 길을 가던 중 일제의 친일 요구를 거부하고 낙향하여 '왕자호동'과 '해방전후'를 끝으로 붓을 꺾고 철원 용담에서 낚시로 소일을 하게된다.

이광수, 서정주 등 우리 나라를 대표하던 문인들이 친일을 할 때 상허 이태준은 과감히 붓을 꺾었다. 작가로서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형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태준은 자신의 글이 제 형제와 누이를 파는 친일 매국행위에 이용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기사입력일 : 2004-06-30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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