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주관중 전 경희대교수님 2004/6/30(수) | |
철학의 해방 철학의 해방 주관중/ 質 철학자 유전공학은 전문적 학문이지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그러면 철학은 어떤가. 푸코, 데리다 등의 현대철학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주고 있는가.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오늘날 '신은 살아 있고 철학은 죽었다'고 말하고 싶다. 현대철학은 철학을 과학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고 과학은 목적론의 부정 위에 성립되어 왔기 때문에, 철학의 과학화도 방법론에 시종하였다. 비트겐슈타인, 훗설같은 철학자는 과학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과거의 모든 철학을 부정하였다. 지난날 갈리레오는 그의 과학이 종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 뻔 하였다. (그는 1633년 로마의 이단재판에서 화형 선고를 받았지만, 플로렌스로 돌아가 1642년에 죽을 때까지 격리 하에서 과학연구·실험을 계속했다.) 당시는 종교인이 재판관이고 과학자가 피고였다. 오늘날에는 과학자가 재판관이고 철학자가 피고의 신세가 되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逆 갈리레오 재판'이라고 부르고 있다. 철학은 장사(유행)가 아니니 '새것' '새것' 할 필요가 없고 철학은 재판이 아니니 '증거' '증거' 할 필요가 없다. 방법은 정밀성을 요구하지만, 목적 방향은 정밀할 필요가 없다. 요즘 다양성이 강조되지만, 방법은 다양해도 목적 방향까지 다양하면 곤란하다. 적어도 세계 인간들이 정밀하지는 않지만, 한쪽 방향으로 가고 있어야 한다. 철학은 과학같은 정밀성이 문제가 아니라 문학처럼 영향력과 감동력이 문제다. 그래서 철학의 위치는 과학과 詩의 중간쯤에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철학은 과학처럼 정밀할 수가 있는가.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서 비를 한 방울도 안 맞겠다면,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한 방울도 안 맞겠다면 집에서 나오지 말아야 한다.(철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비행기는 과학적으로 날아야 하지만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과학적으로 타지 않는다. 비행기 회사와 비행사를 믿고, 날씨를 믿고, 자기 운명을 믿고 탄다. 지금 안간 사회의 위기는 '방향의 위기'이지 '방법의 위기'가 아니다. 인류호라는 배가 나이아가라 폭포같은 단애를 향해 떠내려 가고 있으니 가장 급선무는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방법은 전산기가 잘 하고있다. 철학자는 know-how 보다 know-why에 관심을 기우려야 한다. 상품이라는 것도 엄밀히 과학적으로 따지면 문제투성이지만, 그냥 상품으로는 쓸만하다. 상품이 완전치 못하면 상품으로 성립될 수가 없다. 과학은 교통·통신의 발달로 '하나의 세계'에 기여하고 있지만, 철학은 그 100% 정밀성 노력 때문에 '하나의 세계' 만드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으니 이것이 말이나 되는가. 철학이 권위를 위해 일부러 어렵게 표현하는 것을 philosophiscate라고 나는 이름 붙였다. 예를 들자. '마음에 있는 바를 말하라'를 '내면세계를 언어적 형식으로 표출하라'고 말한다. '가난하면 애국심이 없어진다'를 '계급의식의 크기의 차이가 국민의식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서양에는 '삶의 철학'이 있지만, 이성을 무시하고 논리성을 멸시하고 궁극적 진리에 무관한 것이 문제다. '과학철학'이란 것도 있지만 과학철학 때문에 과학발명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과학발명이 있고 난 다음 왈가왈부하는 것이다. 서양의 현대철학에서는 철학이 '질문이지 회답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더더욱 철학이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엉망이 된 이간사회의 문제들을 누가 해결해 줄 것인가. 그렇다고 동양철학의 단순한 복고만으로도 오늘의 인간사회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가 없다. 오늘의 종교로도 해결이 어렵다. 오늘의 인간사회의 방향을 위해서 시나 소설처럼 우리에게 영향과 감동을 주는 철학을 만들자. 요즘 말하는 '삶의 질'은 생활의 질이 아니라 '삶의 실'에 지나지 않는다. 생활의 실은 공해를 일으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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