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독립기념관 사이트
2004/5/5(수)
(연구논문) 철원애국단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연구(硏究)
 
장 석 흥(張 錫 興)*
 

1. 머 리 말

2.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본부(本部)의
   결성(結成)

  1) 결성당시(結成當時)의 상황(狀況)
  2) 본부조직(本部組織)의 결성(結成)

3. 도단(道團)의 설치와 조직확대(組織擴大)
  1) 강원도단(江原道團)(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의
      설치 경위
  2)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조직확대(組織擴大)

  3) 충청도단(忠淸道團) 및 전라도단(全羅道團)의 설치

4.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활동(活動)
  1) 연통제(聯通制)의 역할(役割)
  2) 대한민국임시정부성립(大韓民國臨時政府成立) 축하시위(祝賀示威)
  3) 조선인관리퇴직동맹계획(朝鮮人官吏退職同盟計劃)

5.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해체(解體)와 이후의 활동(活動)

6. 맺 음 말

 
1. 머 리 말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이라 보통 불리우는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은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3·1운동으로 결집되었던 민족적 역량은 독립운동의 구체적 전개를 위하여 점차 조직화되면서 국내외 각처에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성립을 가져왔을 뿐아니라, 재만독립군(在滿獨立軍) 등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의 결성을 보게 하였다. 이때 생겨난 국내 독립운동단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그리고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등이었다. 이같은 단체들은 임시정부(臨時政府)나 독립군에 대한 지원 또는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독립운동을 발전시켜 갔을 뿐아니라 국외 독립운동의 민족적 기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은 3·1 운동의 발전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3·1 운동 직후의 독립운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국내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 할 것이고, 그 중에도 그의 핵심이 되었던 이들 단체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 국내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안되어 있는 실정이다.1) 이 시기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 경향은 대체로 3·1 운동에 집중되거나 아니면 상해(上海)나 만주(滿洲) 등지의 국외 독립운동에 편중된 느낌이다. 물론 1910년대 이후 독립운동의 주류(主流)가 국외로 전개되어 가면서 국외의 활동이 국내에 비해 보다 활발한 것이었지만, 국내 독립운동의 지원없이는 전개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연구는 3·1운동 이후 발전되어간 민족적 역량의 실상을 밝히는 작업이기도 하며, 또 국내와 국외독립운동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도 해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뜻에서 본 연구는 당시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였던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먼저 그의 조직과 활동을 살핀 다음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에 있어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이 수행했던 역할을 알아보기로 한다.2)
 
 
 
 
2.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본부(本部)의 결성(結成)
 
  1) 결성(結成) 당시(當時)의 상황(狀況)

  대한독립애국단의 결성 배경은 3·1운동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던 당시 독립운동의 상황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일제(日帝)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민족 독립의 역량을 결집하였던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원동력을 형성함으로써 1920년대(年代)의 총력적(總力的) 독립운동의 발판이 되었다. 우선 임시정부의 성립을 촉진하여 독립운동의 지도체제(指導體制)를 이루게 하였으며, 만주(滿洲)등지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투쟁(武裝鬪爭)을 형성 강화케 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대중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단체의 성립을 가져옴으로써. 이후 농민운동·노동운동·사회문화운동 등의 민족운동이 발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3)
  3·1운동이 대중운동으로 확대되면서 가장 절실했던 것은 독립운동을 통할 지도할 수 있는 조직체의 성립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 상해(上海), 노령(露領) 등지에서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되었고, 한편으로 국내를 비롯한 각처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의 결성이 추진되었다.
  서울에서는 3·1운동이 확산되어 가던 3월 중순부터 정부수립을 추진하여 동년 4.23 국민대회(國民大會)의 개최와 함께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수립을 선포했고, 노령(露領) 해삼위(海參威)에서는 문창범(文昌範) 등을 중심으로 동년 3.17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설립하고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를 발표했다. 또한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수립계획이 3월 하순경 서울로부터 상해(上海)에 전해지면서 그곳에서도 임시정부의 수립이 추진되어 동년 4.11 이동녕(李東寧)을 의장(議長)으로 하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과 이승만(李承晩)을 국무총리(國務總理)로 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성립되었다.
  이같은 임시정부의 성립은 민족의 주권적(主權的) 의지(意志)의 표시였을 뿐아니라 독립운동의 조직화와 발전이라는 당시의 현실적 필요에 따른 최선의 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임시정부의 존립(存立)과 활동(活動)을 위해서는 국민적(國民的) 기반(基盤)이 있어야 했다. 임시정부의 성격상 국토(國土)와 국민(國民)의 한계를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내로부터의 국민적 지원이 없이는 그의 유지가 불가능한 것이었다.4) 따라서 임시정부의 당면한 문제는 국내로부터 인적(人的)·물적(物的) 자원을 조달하는 국내의 조직확보였다. 그리하여 상해(上海)의 임시정부에서는 국민적 의지를 한데 모으기 위해 각처 정부의 통합을 주도하는 한편 국내의 조직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특파원이 국내에 파견되었고, 동년 4.30부터 열린 임시의 정원 제4차회의에서는5)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을 위해 구급의연금(救急義捐金)의 모집을 결의하고 각 지방별로 모집위원을 선출하였다.6)
  이와 때를 같이하여 국내에서는 전국적인 규모의 독립운동단체가 결성되면서 3·1운동으로 확대되었던 대중적 기반을 조직화시켜 나갔다. 그 중에는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이 3월말에 주도 결성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같이 상해(上海)의 임시정부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조직되었던 것도 있었고, 상해(上海)에서 파견된 송세호(宋世浩)·연병호(延秉昊) 등이 국내의 이병철(李秉澈)과 연결되어 결성한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같이 임시정부(臨時政府)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도 있었다. 또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처럼 각기 조직된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등의 여성단체(女性團體)를 통합 결성한 것도 있었다. 이처럼 국내독립운동 단체의 조직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그것은 3·1운동을 거치면서 독립운동의 기반이 사회 각층에 확산됨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신현구(申鉉九) 등이 주도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결성은 4월경부터 추진되었다.

  2) 본부조직(本部組織)의 결성(結成)

  그런데 이러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이하 애국단(愛國團)으로 약칭(略稱))의 본부 조직에 대한 실체는 거의 밝혀져 있지 않은 상태이다. 초기 결성과정이나 조직구성, 또 주도인물의 성격 등 어느것도 뚜렷하지 않다. 다만 판결문의 기록을 통해 애국단(愛國團)이 임시정부(臨時政府)와 연결되었다는 것과 본부 조직의 구성에 대한 약간의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러한 점에 주의하면서 본부 조직의 결성과 구성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한다.
  먼저 애국단(愛國團)의 결성 시기에 대해 판결문의 기록에는 신현구(申鉉九)가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내무총장(內務總長) 안창호(安昌浩)의 권유에 의해 5월 말경 애국단(愛國團)을 결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7) 이는 사실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안창호(安昌浩)가 미국(美國)으로부터 상해(上海)에 도착한 것은 1919년 5월 25일이었다. 그리고 내무총장(內務總長)의 집무를 시작한 것은 도착한 후에도 얼마 뒤의 일이었다.8) 그런데 애국단은 이미 4월경부터 결성이 추진되어 김순호(金順皓)·김영식(金永植) 등을 동지로 포섭하였고, 5월 초순경부터는 이들에 의한 전라도(全羅道) 방면의 조직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9) 따라서 애국단은 안창호(安昌浩)가 상해(上海)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결성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애국단의 초기 활동에서는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지원(支援)을 내세우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동년 8월 이후에 전개되었던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설치과정에서는 임시 정부의 지원이 명백히 애국단의 행동지침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비해,10) 그에 앞서 전개되었던 전라도(全羅道) 방면의 활동(活動)에서는 임시정부의 지원을 표방하지 않고 다만 독립운동의 조직화와 그에 따른 재정 자금의 모집이 우선되고 있었다.11) 이러한 사실은 애국단의 결성이 처음부터 임시정부에 의한 조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애국단의 중심인물인 신현구(申鉉九)(1882∼1931)는 충남(忠南) 논산(論山) 출신의 기독교인으로서 일찌기 고향에서 교회활동(敎會活動)을 펴던 중,12) 미선교사(美宣敎師) 윌리엄즈(Frank Earl Cranton Williams, 우리암(禹利岩))를 만나게 되면서 그가 세운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의 교사(敎師)로 이규갑(李奎甲)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13) 그후 서울에 올라온 뒤에도14) 기독교계통의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3·1운동을 맞이했다. 이때 기독교계통의 인사들과 함께 참여하던 중 3·1운동이 점차 민중운동(民衆運動)으로 확산됨에 따라 그는 독립운동의 조직체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은 동년 4월경 구면의 권인채(權仁采)를 만나면서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권인채(權仁采)가 상해(上海)의 임시정부(臨時政府)와 연결되었던 관계로15) 애국단은 이후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러한 속에서 신현구(申鉉九)는 안창호(安昌浩)로부터 애국단을 설치한데 대한 감사장을 받았던 것이다.l6) 그리고 당시 독립 운동계의 구심체로서 국내외 독립운동을 통할 지도해갔던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영향에 따라 그의 지원을 행동지침으로 삼게 되었다.
  다음에 본부 조직의 구성과 참여 인물을 보면, 판결문의 기록상 확인되는 것은 단장(團長)(신현구(申鉉九))·재무총장(財務總長)(김순호(金順皓))·재무감독(財務監督)(문봉의(文鳳儀)) 뿐이다.17) 그런데 애국단의 조직 구성은 <애국단행정기관반포문(愛國團行政機關頒布文)>에 의거해 조직했던 철원군단(鐵原郡團)이나 강원도단(江原道團)의 구성을 살펴볼 때 체계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단장아래 재무(財務)·서무(庶務)·통신(通信)·외교(外交)·학무(學務) 등의 부서가 있고 군단(郡團)에는 과(課)(과장(課長)), 도단(道團)에는 국(局)(국장(局長))을 두었다.18) 이로 미루어 본부 조직도 대체로 단장아래 재무(財務)·서무(庶務)(내무(內務?)), 통신(通信)·외교(外交)·학무(學務) 등의 부서에 부(部)(?·총장(總長))를, 그리고 별도로 각 부서에 감독(監督)을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은 본부 조직에 참여한 인사로는 신현구(申鉉九)를 비롯하여 권인채(權仁采)·문봉의(文鳳儀)·김순호(金順皓)·김영식(金永植)·서병철(徐丙轍)·안황(安滉)·신현창(申鉉彰)·안교일(安敎一)·김영철(金永喆)·이시우(李時雨)·김상덕(金相德) 등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본부 조직의 구성은 20대(代)의 신교육을 받은 청년층이 대부분 중심을 이룬 것이었다.19)
  이러한 본부 조직을 중심으로 애국단은 신현구(申鉉九)의 동생인 신현창(申鉉彰)을 상해(上海)로 파견하는 등20) 임시정부와 밀접한 교류를 가지면서, 전국 각지에 조직을 확대해 갔다.

 
 
 
 
3. 도단(道團)의 설치와 조직 확대
 

  1) 강원도단(江原道團)(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의 설치경위

  본부조직의 결성 후 각처에 지단(支團)이 설치되었는데 그중 조직과 활동면에서 강원도단의 규모가 가장 컸다. 그러한 이유로 대한독립애국단21)을 속칭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이라고 한다.22) 처음 철원군단(鐵原郡團)에서 출발한 철원애국단은 곧 도단(道團)으로 승격되면서 강원도의 조직을 관할하였다. 그러면 강원도단의 설치 과정부터 보기로 한다.
  철원군단(鐵原郡團)의 설치는 애국단 본부의 권인채(權仁采)와 김상덕(金相德)(재근(載根))에 의해 계획되었다. 강원도(江原道) 금화(金化)출신으로 3·1운동 당시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학생(學生)이었던 김상덕(金相德)은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23) 옥고를 치르던 중 동년 8월 6일에 보석으로 출옥하였다.24) 다음날 남대문(南大門) 밖 노상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권인채(權仁采)를 만나 그로부터 애국단(愛國團)의 설치에 관한 내용을 듣게되었고, 이때 강원도 지역에도 애국단의 지단(支團)을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즉시 애국단의 조직과 설치 규정을 기재한 <애국단행정기관반포문(愛國團行政機關頒布文)>을 갖고 철원(鐵原)에 내려간 김상덕(金相德)은 8월 9일 철원(鐵原) 남감리교회(南監理敎會)의 목사 박연서(朴淵瑞)를 찾아 애국단의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이에 따라 동일 밤 박연서(朴淵瑞)의 집에서 강대여(姜大呂)·김철회(金喆會)·박건병(朴健秉) 등이 모여 군단(郡團) 설치에 대한 1차 모임을 가진 후, 이틀 후인 8월 11일 철원군(鐵原郡) 동송면(東松面) 관우리(觀羽里)에 위치한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위의 인사(人士)외 김완호(金完鎬) ·이용우(李用雨)·이봉하(李鳳夏)·오세덕(吳世德) 등이 참석한 가운데 철원군단(鐵原郡團)을 결성하였다.25) 이어 다음날에는 부서 및 임원을 정하여 군단장(郡團長)(이봉하(李鳳夏))·서무과장(庶務課長)(강대여(姜大呂))·재무과장(財務課長)(김완호(金完鎬))·통신과장(通信課長)(박연서(朴淵瑞))·학무과장(學務課長)(박건병(朴健秉))·외교부원(外交部員)(이용우(李用雨)·김철회(金喆會)·오세덕(吳世德)) 등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김상덕(金相德)의 소개장과 함께 통신과장(通信課長) 박연서(朴淵瑞)를 서울로 보내 애국단(愛國團) 단장(團長) 신현구(申鉉九)에게 철원군단의 설치 상황을 보고케 했다. 이때 애국단 본부에서는 철원군단으로 하여금 강원도의 조직을 관할케 함으로써 철원군단은 강원도단(江原道團)으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철원군단의 부서도 군단장(郡團長)에서 도단장(道團長)으로, 각 과장(課長)은 국장(局長)으로 승격되면서 도단(道團)체제를 갖추었다.26)
  그런데 이상의 강원도단 설치 과정을 볼 때 몇가지 주목되는 점이 있다. 첫째는 김상덕(金相德)이 애국단(愛國團) 설치를 위해 철원(鐵原)의 박연서(朴淵瑞)를 찾아갔다는 사실에서 이들이 이미 이전부터 교류를 가졌다는 점이고 다음에는 김상덕(金相德)이 박연서(朴淵瑞)를 만나 애국단(愛國團)의 설립취지를 설명한지 불과 이틀만에 철원군단(鐵原郡團)이 결성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결성 장소가 불교사찰인 도피안사(到被岸寺)였다는 사실도 주의해 볼 만하다.
  먼저 김상덕(金相德)이 박연서(朴淵瑞)를 찾을 수 있었던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철원(鐵原)은 강원도(江原道)의 교통(交通)·교육(敎育)의 중심지였다. 3·1운동때만 해도 강원도(江原道)는 철원(鐵原)·평강(平康) 등지를 제외하고는 전역이 전근대적인 조운의 길을 따라 교통하고 있었다.27) 이에 비해 철원(鐵原)에는 경원선(京元線)이 통과하여 서울은 물론 원산(元山)을 비롯한 함경도(咸鏡道)까지 연결되었고, 멀리는 만주(滿洲)의 간도(間島)로까지 통할 수 있었다.28) 따라서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에 의하여 철원(鐵原)은 일찍부터 신교육(新敎育)이 발달하였고, 그에 따른 민족의식(民族意識)이 성숙되고 있었던 곳이다.29) 그리하여 3·1운동 이전에 이미 노동야학(勞動夜學)이 생겨날 정도였고,30) 3·1운동의 경우를 봐도 철원의 만세 운동이 강원도에서는 가장 빨랐다. 그리고 신문화(新文化)의 영향을 받은 청년(靑年)이 추진하여 대중운동(大衆運動)으로 성공시킨 것도 철원(鐵原)의 만세운동이 대표적이었다.31)
  그런데 이같은 철원의 3·1운동에는 박연서(朴淵瑞)의 영향이 컸다. 비록 그가 표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교회(敎會)를 중심으로 시국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철원의 만세운동은 시작되었다.32) 또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의 강대여(姜大呂)·김철회(金喆會)·박건병(朴健秉)·이봉하(李鳳夏) 등도 교회(敎會) 및 교육활동(敎育活動)을 통해 철원의 항일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인사(人士)들이었다.
  한편 김상덕(金相德)은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진학하기 이전에 철원(鐵原)에 이웃한 금화(金化)에서 사립학교(私立學校) 신창학교(信昌學校)를 세우고 교육활동(敎育活動)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33) 후에 전도활동(傳道活動)을 펼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따라서 철원(鐵原)지방의 교육(敎育) 및 교회(敎會) 인사(人士)들과도 자연 잦은 교류를 가졌을 것이고, 그러한 관계로 그는 철원(鐵原) 남감리교회(南監理敎會) 목사(牧師)인 박연서(朴淵瑞)를 찾아가 쉽게 애국단(愛國團) 설치에 관한 의논을 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김상덕(金相德)이 철원(鐵原)에 내려간지 불과 이틀만에 철원군단(鐵原郡團)이 결성될 수 있었던 점에 대해 보기로 한다.
  박연서(朴淵瑞)는 물론 강대여(姜大呂)·김철회(金喆會) 등 대부분이 철원남감리교회(鐵原南監理敎會)의 지도급 인사(人士)였다. 그리고 이들은 서울에서 대부분 신교육(新敎育)을 받았던 사람들로 철원(鐵原)에 사립학교(私立學校)를 세우거나 또는 교원으로 활동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있었다.34) 따라서 이들은 일찍부터 동지적 결합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3·1운동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독립운동의 조직화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조직을 갖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던 중 김상덕(金相德)이 애국단(愛國團) 설치의 내용을 알려오게 되자 그 같은 기반위에서 즉시 철원군단(鐵原郡團)을 결성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 상태였다면 애국단 설치의 소식을 접한지 불과 이틀만에 그와같은 체계적인 조직을 성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통해 3·1운동의 민족적 역량이 조직화(組織化)되어 가는 점을 살필 수 있고, 아울러 그의 기반이 자생적이었음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주목되는 것은 철원군단의 결성 장소가 불교사찰인 도피안사(到彼岸寺)였다는 점이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철원군단을 주도 결성했던 인사(人士)들은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불교 사찰에서 조직을 결성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은닉처로 택했다고 하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보여진다.
  3·1운동때 강원도에서는 불교계의 운동이 없었다.35) 또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종교간의 교류도 찾기 어려웠다.36) 그런데 3·1운동을 통해 민족적(民族的) 공동운명(共同運命)에 처하게 되면서 종교간의 반목(反目)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후 독립운동의 전개에 있어 종교를 초월한 합류(合流)가 이루어졌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불교 승려 신상완(申尙玩)이 철원애국단과 연결되어 독립시위를 추진해 갔던 점등은 바로 그러한 예다. 따라서 철원군단의 결성에 불교 승려가 직접 참여했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하더라도,37)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철원군단이 결성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을 통해, 3·1운동 직후 철원 남감리교회를 중심한 인사(人士)들은 독립운동의 조직화에 뜻을 모아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서울로부터 애국단 설치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그 같은 기반 위에서 철원애국단을 결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철원 애국단의 결성은 위로부터의 지시에 의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3·1운동의 역량을 자생적으로 발전시켜 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면모는 다음에서 보는 조직 확대과정과 활동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2)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조직확대(組織擴大)

  강원도단의 조직 확대는 도단(道團)에서 활동자금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조종대(趙鍾大)가 주관했다.
  조종대(趙鍾大)(1873∼1922)는 황해도(黃海道) 금천(金川) 출신으로 철원(鐵原)에서 성장한 기독교 전도사였다.38) 한의학(漢醫學)을 전공, 약종상(藥種商)을 하기도 했던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전에 철원의 봉명학교(鳳鳴學校)와 배영학교(培英學校)를 중심으로 구국교육 활동을 폈었다. 당시 배영학교(培英學校)는 군사교육(軍事敎育)까지 실시하던 민립학교(民立學校)였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후39)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뒤 서울에 있으면서 상동교회(尙洞敎會)의 선교사업에 종사하였고,40) 금천(金川)을 비롯한 황해도 일대와 철원(鐵原) 등 강원도 각지를 다니며 선교활동을 폈다. 그러한 관계로 교육사업(敎育事業)을 통한 철원지방의 인사(人士) 및 강원도 일대의 기독교 인사 그리고 약종상의 직업 등으로 강원도 지방의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그는 선교활동을 펴는 한편으로 조선인관리퇴직동맹(朝鮮人官吏退職同盟)에 필요한 재정자금의 모집을 계획하고 있었다.41) 그러던 중 배영학교(培英學校) 시절부터 같이 활동했던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서무국장(庶務局長) 강대려(姜大呂)로부터 8월 21일경 애국단의 설치 사정을 듣게 되었고,42) 이 때 조종대(趙鍾大)는 강원도 각 군에 군단(郡團)을 설치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후 그는 일단 서울에 올라와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조직화대에 따른 준비를 진행하는 한편 강원도단에서 파견한 통신국장(通信局長) 김철회(金喆會)와43) 서울에서 9월 초, 중순에 두차례 만나 활동자금의 지원 등을 협의하였고, 동년 9월 26일(日)경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활동 경로는 원주(原州)를 시작으로 횡성(橫城) 등지의 강원도 서남지방에서 강릉(江陵) ·양양(襄陽)의 동부지방을 거쳐 금화(金化)·철원(鐵原)의 북부지방을 순회한 것으로, 강원도의 거의 전역에 해당되는 것이었다.44)
  이러한 강원도단의 조직확대는 일단 조종대(趙鍾大)의 순회활동으로 강릉(江陵)·양양(襄陽) 등지에 군단(郡團)을 설치함으로써 거점을 확보한 뒤에 각 군단(郡團)을 중심으로 조직을 강화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면 이같은 조직의 확대 과정을 먼저 살피기로 한다.
  9월 26일경 원주(原洲)에 도착한 조종대(趙鍾大)는 원주(原州) 감리교회(監理敎會) 목사(牧師) 조윤여(趙潤如)를 찾아 군단(郡團)설치를 권유하고 다음날 횡성(橫城)의 감리교회 목사 방기순(方基淳), 그리고 역시 강릉(江陵)의 감리교회 목사 안경록(安慶錄)을 만나 애국단의 군단(郡團) 설치를 부탁했으나 이들의 거절로 군단(郡團)을 설치하지는 못했다.45)
  이어 강릉(江陵)의 엄성훈(嚴成勳)·엄정섭(嚴正燮) 부자(父子)를 찾아 애국단의 설립 취지를 설명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강릉군단(江陵郡團)을 설치케 했다. 이때 조종대(趙鍾大)는 엄성훈(嚴成勳)에게 앞서의 안경록(安慶錄)에 대해 다시 설득할 것과 평창(平昌) 지역에 군단(郡團)을 설치케 할 것을, 그리고 엄정섭(嚴正燮)에게는 울진(蔚珍) ·삼척(三陟) ·평해(平海) 등지에 조직을 확대할 것을46) 종용하고 그에 필요한 경비는 도단(道團)으로부터 지원케 했다.47)
  다음 10월 2일에는 양양(襄陽)의 감리교회 목사 김영학(金永鶴)을 찾아가 이양군단(裏陽郡團)을 조직케했다. 양양(襄陽)의 감리교회는 3·1운동때도 기지(基地)로 활용되었던 곳이었고,48) 또 김영학(金永鶴)은 조종대(趙鍾大)와 같은 고향 출신으로 절친한 사이였을 뿐아니라, 1914년경 철원 감리교회의 교구장(敎區長)을 맡은 일이 있어49) 철원의 도단(道團) 인사(人士)와도 교류를 갖고 있던 터였다. 이러한 이유로 양양군단(襄陽郡團)의 설치는 쉽게 이루어졌고 이후의 활동 또한 활발하였다.
  양양군단(襄陽郡團)을 설치한 후, 조종대(趙鍾大)는 10월 5일경 금화(金化)로 향하여 이장욱(李章郁)에게 앞서와 같이 군단(郡團) 설치를 권유했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철원(鐵原)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조종대(趙鍾大)의 순회 활동으로 일단 강릉(江陵)·양양(襄陽) 등지에 군단(郡團)을 설치하였던 강원도단(江原道團)은 이후 이를 거점으로 더욱 조직을 확대해 갔다.
  강릉(江陵)의 엄성훈(嚴成勳)은 강릉군단(江陵郡團)을 조직한 직후, 평창(平昌)의 이기헌(李起憲)·이근세(李根世)를 포섭하여 그들로 하여금 평창군단(平昌郡團)을 설치케 했다. 이때 이기헌(李起憲)·이근세(李根世)는 조두환(曺斗煥)·고제락(高濟洛)·김지용(金趾容)·목사(牧師) 김용준(金容俊) 등을 군단(郡團)에 가입시키는 한편 이근세(李根世)가 군단장(郡團長), 이기헌(李起憲)이 통신원의 일을 맡았다. 또한 이들은 도단(道團) 및 단원간의 연락에 암호(暗號)를 사용하여 비밀을 유지했다.50)
  그런데 이러한 평창군단(平昌郡團)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창일계(昌一契)라는 별동조직(別動組織)을 구성했던 점이다. 창일계(昌一契)는 표면상 이식계(利殖契)를 위장하며 계원(契員)을 모집했을 뿐 아니라 계(契)의 운영으로 모아진 자금은 단(團)의 활동 경비로 사용할 목적에서 조직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필규(禹弼奎) 등 18명이 창일계(昌一契)에 가입했고 애국단이 발각될 때까지 2백 수십원의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51) 이와같은 창일계(昌一契)는 당시 애국단의 조직이 대중적 기반에 접근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다음에 양양군단(襄陽郡團)의 경우는 군단장(郡團長) 김영학(金永鶴)의 활약으로 김형석(金亨錫)·이근옥(李根玉)·이석규(李錫圭)·김연수(金延洙)·문명섭(文命燮) 등이 가입했고, 이근옥(李根玉)의 주도로52) 상해(上海)의 임시정부(臨時政府)에 투신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10월 30일경 이근옥(李根玉)·이석규(李錫圭)·김연수(金延洙)·문명섭(文明燮) 등은 상해(上海)로 가기 위해 철원(鐵原)을 거쳐 서울에 갔으나 애국단본부(愛國團本部)와 연락이 단절된 상태에서53) 이근옥(李根玉)만을 남기고 나머지 동지는 귀향하고 말았다.
  이상에서 강원도의 조직이 확대되어 간 상황을 살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몇가지 주목되는것이 있다. 첫째, 기독교 계통의 조직이 활발했다는 점이다. 조종대(趙鍾大)가 군단(郡團)설치를 위해 만났던 사람 가운데 대부분이 감리교회(監理敎會) 목사(牧師)이거나 교인(敎人)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원주(原州)·횡성(橫成) 등지와 같이 군단을 설치하지 못한 곳도 있었지만 조직 확대에 기독교 계통의 조직이 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사실은 3·1운동 때만 해도 대중적 기반을 갖지 못했던 강원도의 기독교가 3·1운동을 거치면서 대중적 기반에 접근해 갔던 것과 관련시켜54) 볼 수 있다.
  다음에는 짧은 기간에 조직을 확대할 수 있었던 점이다. 조종대(趙鍾大)가 강원도 일대를 순회했던 기간은 열흘 정도였다. 이후 각 군단을 거점으로 동지 포섭 및 조직을 강화하는데 걸렸던 기간도 열흘정도였다. 물론 조종대(趙鍾大)의 순회활동에는 그의 폭넓은 인적기 반이 작용한 것도 있지만 그러한 데에는 3·1운동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의 기반이 대중화되었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실제 이들의 대부분은 3·1운동을 주도했거나 참여했던 경험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민족적 역량이 바탕이 되어 곧 조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55)
  끝으로, 평창(平昌)의 창일계(昌一契)같이 자생적(自生的)인 조직 기반을 이루었던 점은 애국단조직(愛國團組織)의 성격(性格)을 이해하는데 주목된다.

  3) 충청도단(忠淸道團) 및 전라도단(全羅道團)의 설치

  애국단(愛國團)은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에도 도단(道團)을 설치하고 그의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런데 이 지역의 조직은 강원도단(江原道團)에 비해 규모가 작았지만 조직과 활동면에서 다양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먼저 충청도 방면의 조직을 보면, 지역상 충청남도에 한하여 설치되었고 조직상황은 대략 세 갈래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하나는 본부의 재무감독인 문봉의(文鳳儀)를 통한 조직과 다른 하나는 서병철(徐丙轍)에 의한 서산일대(瑞山一帶)의 조직, 그리고 애국단(愛國團)의 인사(人士)가 주도 참여하여 결성한 혈복단(血復團)의 조직등이었다. 종래 애국단의 충청도단은 문봉의(文鳳儀)에 의한 조직만이 알려 졌다.
  문봉의(文鳳儀)는 이시우(李時雨)를56) 파견하여 청양(淸陽)·예산(禮山)·논산(論山) 일대의 조직을 확대하는데 힘을 쏟아 1919년 11월경 청양군단(淸陽郡團)을 설치하였다. 이 때 청양군단장(淸陽郡團長)에는 유환방(兪煥邦), 충청남도단(忠淸南道團) 단장(團長)은 유경재(兪暻在)가 맡았고, 서승렬(徐承烈), 정상길(鄭相吉) 등이 참여했다.57) 이들은 부자(父子) 또는 처남(妻男) 매부(妹夫)의 사이로 3·1운동 때에는 향리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58) 주로 애국단 본부의 재정자금 지원활동을 폈는데 그 이상 발전적인 조직을 갖지는 못했다.
  다음으로 서산(瑞山) 일대를 중심한 서병철(徐丙轍)의 조직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애국단의 결성이 추진되던 4월경 권인채(權仁采)를 통해 애국단에 참여한 서병철(徐丙轍)은 동년 7월부터 서산(瑞山)의 임정현(林禎鉉)·가재창(賈在昌)등을 권인채(權仁采)와 연결시키는 한편 그들의 회합장소 및 경비를 제공하면서 활동을 지원하였다.59) 또 김동선(金東璿)을 포섭하여 서산(瑞山) 일대의 조직을 강화해 갔다.60) 그런데 이같은 서병철(徐丙轍)의 활동에 주목되는 것은 이 무렵 그가 이종성(李鍾聲) ·한국태(韓國泰) 등의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 인사(人士)와도 교류(交流)를 갖고, 그들로 하여금 서산군(瑞山郡) 안면도(安眠島)에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의 지단(支團)을 설치케 했다는 점이다.6l) 평양(平壤)의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교(崇實學校)·광성학교(光成學校)의 교직원·학생 및 기독교인이 1919년 9월경 조직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은 애국단(愛國團)처럼 임시정부의 지원을 목적한 독립운동단체였다.62) 그리고 이들은 서울의 기독교계통 학교나 공주(公州)의 영명학교(永明學校) 등과도 연결되어 활동을 폈다.63)
  그런데 이러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의 서울이나 충청도 방면의 활동에는 서병철(徐丙轍)의 역할이 컸다. 서병철(徐丙轍)은 이들을 애국단 본부의 권인채(權仁采)에 연결시켜 독립운동의 방도를 함께 강구하게 하는 한편 서산(瑞山)방면에 전혀 연고(緣故)가 없는 이종성(李鍾聲)·한국태(韓國泰) 등에게64) 자금지원을 하면서 지단(支團) 설치를 위촉하였다. 뿐아니라 앞서의 임정현(林禎鉉)·가재창(賈在昌) 등 서산(瑞山) 출신의 청년(靑年)들을 이들과 합류시켜 안면도(安眠島)에 지단(支團)을 설치케 했던 것이다.65)
  이렇게 볼 때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의 서산지단(瑞山支團)은 애국단(愛國團)과 전혀 별도로 결성된 것이 아니었다. 또 지역적인 조건을 고려하더라도 서산(瑞山)은 애국단의 영향이 컸던 곳이었다. 그런데도 서산(瑞山)에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의 지단(支團)이 설치될 수 있었던 데에는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병철(徐丙轍)이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의 이종성(李鍾聲)과 동지적 결합을 이루고, 그로 하여금 조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양 단체가 합류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의 서산지단(瑞山支團)은 애국단 계열의 조직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혈복단(血復團)은 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원(金泰源)과 애국단(愛國團)의 문봉의(文鳳儀)·안교일(安敎一)을 비롯하여 김교상(金敎爽)·김교선(金敎善) 형제, 신봉균(申鳳均)66) 신상균(申相均)·이정방(李鼎邦) 등이 1919년 11월경에 결성한 비밀결사였다.67) 정식 결성은 11월경이었지만 이들은 일찍부터 동지적 결합을 이루고 있었다. 동년 7월 상해(上海)에서 파견된 김태원(金泰源)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애국단의 신현구(申鉉九)와 함께 연통제(聯通制) 실시에 따른 활동을 전개했었다.68) 그리고 안교일(安敎一)·문봉의(文鳳儀)는 혈복단(血復團)이 결성되기 전부터 애국단원(愛國團員)으로 활약했다. 따라서 혈복단(血復團)이 전혀 새로운 조직만은 아니었다. 또 그의 활동과 목적도 애국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69)
  이러한 혈복단(血復團)과 애국단(愛國團)의 관계는 그의 결성시기와 관련하여 살필 수 있다. 혈복단이 결성되던 11월은 애국단(愛國團)을 주도하던 신현구(申鉉九)가 일경에 피체되었던 때이다.70) 따라서 애국단 단장 신현구(申鉉九)의 피체로 본부의 활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원(金泰源)·신봉균(申鳳均) 등이 애국단의 인사와 함께 혈복단(血復團)을 결성하여 애국단(愛國團)의 조직을 계승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실은 애국단의 재무감독으로 충청도 조직을 주관했던 문봉의(文鳳儀)가 신현구(申鉉九)의 피체 이후 혈복단(血復團)의 충청남도 대표로 활동하는 것에서도 찾아질71) 수 있다. 이같은 혈복단이었으므로 김태원(金泰源)의 활동으로 논산(論山) 방면에 설치한 혈복단의 조직도72) 애국단의 조직 활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외 충청도 방면의 조직 활동으로, 애국단 본부의 김영식(金永植)이 이병국(李炳國)을 통해 천안(天安)·당진(唐津) 등지에 활동한 기록이 보이고 있으나73) 지단이 설치될 정도로 조직이 발전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상에서 충청도 방면의 조직 상황을 보았는데, 강원도단의 경우와는 달리 여러 갈래의 계통으로 조직이 설치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 중에도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과의 연합 또는 합류하여 설치했던 서산(瑞山)의 안면도(安眠島) 지단(支團)이라든지 애국단의 후계 조직이라 할 수 있는 혈복단(血復團)의 활동 등은 애국단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주목되는 것이다.
  이러한 충청도의 조직 활동에 비해 전라도의 조직 상황은 활발히 전개되지 못하였다. 재무총장 김순호(金順皓)의 지도로 김영식(金永植)이 주관한 전라도의 조직 활동은 기록상에 의하면 전라북도 고창(高敞) 지역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김순호(金順皓)의 권유로 애국단에 가입한 김영식(金永植)은 1919년 5월 초부터 고창(高敞)의 강대선(姜大宣)을 포섭하여 조직의 기초를 다지는 한편 고창부호(高敞富豪) 강대직(姜大直)을74) 상대로 재정자금의 모집활동을 됐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러한 전라도 방면의 활동은 시기적으로 볼 때는 애국단의 지단 가운데 가장 앞선 것이었다. 이때 전라도 조직에는 김영식(金永植)을 책임자로 하여 박인식(朴仁植)·강대선(姜大宣)·이기하(李起河)·유희영(柳熙榮) 75) 등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같이 시기적으로 앞섰던 전라도의 조직이 더 이상 확대되지 못했던 데에는 고창(高敞)의 강대선(姜大宣)을 빼고는 대부분이 서울에 생활 근거를 갖고 있었던 때문인 것 같다.76)

 
 
 
 
4.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활동(活動)
 
  1) 연통제(聯通制)의 역할(役割)

  원래 연통부(聯通府)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국내에 대한 기본조직이었다. 이러한 연통제는 비밀조직의 성격상 관제(官制)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의 핵심적인 조직으로서 "국민간에 기맥을 상통하고 복국사업의 완성을 기하여 내외활동의 일치"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77) 따라서 연통제의 주요 활동은 임시정부의 선전·통신연락·자금수합 등이었다. 이같은 연통제는 1919.7.10에 공포된 후 함경도(咸鏡道)·평안도(平安道)·황해도(黃海道) 등지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런데 강원도(江原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 등지에서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고, 그의 역할을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을 비롯한 대한청년외교단(大韓靑年外交團)·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등의 조직이 대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78) 그러면 애국단이 연통제(聯通制)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알아 보기로 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애국단은 연통제(聯通制)가 실시되기 이전에 이미 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임시정부의 지시에 의해 조직된 단체도 아니었다. 그런데 결성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와 연결되었고, 이후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직을 확대해 갔다. 당시 임시정부는 국내조직에 힘을 기울이고 있던 때였으므로 애국단의 조직을 적극적으로 통할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같은 과정에서 애국단은 임시정부의 지원을 활동목표로 삼고 국내조직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즉 애국단의 지방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의 선전·통신연락·자금수합 등은 곧 연통제의 역할이었다.
  뿐아니라 1919년 7월경 '연통제(聯通制) 실시의 임무를 띠고 국내에 파견되었던 김태원(金泰源)이 신현구(申鉉九)를 찾아와 연통제(聯通制)에 관한 의견을 교환한 것이라든지, 이때 신현구(申鉉九)가 김태원(金泰源)에게 연통제 규칙서를 건네주었던 것을 보면79) 애국단이 연통제의 역할을 대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직의 구성에 있어서도 명칭만 다를 뿐 체계적인 성격은 연통제의 기능과 비숫한 것이었다.80)
  그리고 이러한 연통제의 역할은 혈복단(血復團)으로 계승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애국단의 활동이 연통제의 역할만은 아니었다.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생적(自生的)인 조직 기반을 바탕으로 독립시위·조선인관리퇴직동맹계획(朝鮮人官吏退職同盟計劃)과 같은 활동을 전개했다.

  2) 대한민국임시정부성립(大韓民國臨時政府成立) 축하시위(祝賀示威)

  애국단의 만세시위는 서울의 본부(本部)와 강원도단(江原道團)에서 각각 추진되었다. 서울 본부에서 일제의 소위 천장절(天長節)을 기해 거행하려 했던 것까지 합치면 모두 세차례의 독립시위가 계획되었고. 그 중 두 차례의 시위를 거행했다. 그러면 시기적으로 앞섰던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시위부터 보기로 한다.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시위는 상해 임시정부의 강원도 특파원 신상완(申尙玩)이 9월 중순경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서무국장(庶務局長) 강대여(姜大呂)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성립 축하시위의 계획을 전달하면서 추진되었다.
  3·1운동 이후 각처에 생겨났던 임시정부는 동년 9월 초에 하나로 통합되었는데 이로써 독립운동계는 더욱 활기를 띠었고,81) 그에 따라 국내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독립시위가 계획되었다.
  이때 강원도단에서는 아직 군단(郡團)이 설치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82) 철원(鐵原)을 중심한 지역에서만 시위를 추진했다. 강대여(姜大呂)의 주관으로 단원 전원이 참여한 철원의 시위는 추진과정에서부터 치밀한 계획으로 진행되었다. 10.10 시위후83) 애국단의 조직이 발각될 것을 방지하기 위해 표면상 박건병(朴建秉)·오세덕(吳世德)으로 하여금 시위를 주도케한 뒤 이들을 상해(上海)로 망명시켜 임시정부(臨時政府)에 참여케 한 것과,84) 또 애국단이 발각되기 전까지 시위의 주체가 탄로나지 않을만큼 철저히 위장했던 사실에서85) 그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때, 박건병(朴健秉)은 서울을 왕래하며 선언서·만국기 등을 가져와 이를 수백장 인쇄 배포하였고,86) 거사 당일인 10.10에는 박건병(朴健秉)·오세덕(吳世德)이 임시정부축하회(臨時政府祝賀會)를 열어 연설(演說)을 가진 후 태극기 및 만국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87) 여기에 철원(鐵原)의 대중들은 상점(商店)의 문을 닫으면서 시위에 호응하였다.88)
  이같이 시위를 성공적으로 거행한 뒤 박건병(朴健秉)·오세덕(吳世德)은 무사히 상해(上海)로 넘어갔고. 이후 박건병(朴健秉)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강원도의원(江原道議員)을 거쳐89) 철원(鐵原)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용만(朴容萬)과 더불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준비위원(準備委員)으로 활약했다.90)
  한편 철원의 시위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신상완(申尙玩)의 역할이다. 원래 불교승려 출신이었던 그는 3·1운동때 한용운(韓龍雲)의 지도 아래 중앙학림(中央學林)의 학생대표로 불교계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91) 그뒤 상해(上海)로 넘어가서는 불교승려의 비밀결사인 승려의용군(僧侶義勇軍)의 조직을 주도하는 한편 안창호(安昌浩)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92) 임시정부의 특파원(特派員)으로 국내를 드나들며 활동을 폈다. 그런데 이와같은 불교계의 인사(人士)가 기독교의 인사(人士)가 주축이 되었던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과 합류(合流)하여 시위를 추진시켰다는 것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종교적(宗敎的) 이념(理念)을 초월하여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1운동 때만 해도 강원도(江原道)에서는 종교적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못했었다.
  다음에는 본부에서 추진했던 시위를 보기로 하는데 두 차례 모두 연합시위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일제의 소위 천장절(天長節)인 10.31을 기해 거행키로 했던 처음의 시위계획은 임시정부 특파원 이종욱(李鍾郁)이 전달한 박은식(朴殷植) 외(外) 29명(名)의 명의로 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의해 서울의 각 독립운동단체들이 결합 추진하고자 했던 것이다.93) 이때 애국단(愛國團)에서는 신현구(申鉉九)를 비롯한 본부단원이 참여했다.94) 그런데 선언서(宣言書)에 명기한 민족대표(民族代表)의 구성(構成)이 국외인사(國外人士)이므로 효과가 핍소(乏少)된다는 대동단(大同團)의 주장에 의해 연기되고 말았다.95)
  이에 따라 대동단(大同團)의 주도로 11.1부터 다시 시위를 추진하였고 역시 여기에도 애국단(愛國團)의 신현구(申鉉九)·안교일(安敎一) 등이 참여했다.96) 그런데 이를 살피기 앞서 당시 상황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임시정부의 통합 이후 국내독립운동계는 활기를 띠면서 각계 각층에서 독립시위를 추진하였다. 강원도단의 시위도 그러한 움직임의 하나였다.
  이무렵 대동단(大同團)에서는 본부(本部)를 상해(上海)로 옮길 것을 계획함에 따라 김가진(金嘉鎭)이 10월 10일 상해(上海)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이어 의친왕(義親王)의 망명(亡命)을 추진하는 한편 3·1운동과 같은 방법에 의한 독립시위를 계획했다.97) 이때 11월 27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추진했던 독립시위는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民族代表) 33인(人)의 구성으로 보더라도 대동단(大同團)이 주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98)
  그런데 도중에 의친왕(義親王)의 상해망명(上海亡命)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대부분의 대동단인사(大同團人士)가 피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위의 추진이 어렵게 되자99) 여기에 신현구(申鉉九)·안교일(安敎一)·이신애(李信愛) 등이 적극 참여하여 예정대로 진행시켜 갔다. 그러나 신현구(申鉉九)가 11월 20일에 피체됨에 따라 이후에는 안교일(安敎一)·이신애(李信愛) 등이 주도하여100) 당초 보다는 훨씬 축소된 규모로 예정일보다 하루 늦은 11월 28일에 안국동(安國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l01)
  이상 본부의 시위를 볼 때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애국단의 인사와 대동단의 인사가 함께 시위를 계획하고 거행했다는 점이다. 이같은 독립운동단체간의 합류에는 임시정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시위의 추진과정이나, 또 안교일(安敎一)·김영철(金永喆) 등이 양단체에 모두 관계했던 것을 보면102) 당시 독립운동단체들이 결속을 강화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3) 조선인관리퇴직동맹계획(朝鮮人官吏退職同盟計劃)

  강원도단의 조종대(趙鍾大)가 주도하여 추진한 조선인 관리의 퇴직동맹은 일제의 식민기관에 종사하는 한국인을 일제히 퇴직케하여 일제의 행정기능을 마비시킴으로써 독립 달성을 촉진한다는 원대한 방략이었다.103) 이는 임시정부의 시정방침에도 나타난 것이었다.104) 그런데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퇴직자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재정적 뒷받침이 따라야 했으므로, 조종대(趙鍾大)는 그의 준비작업인 재정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은 강원도단의 조직확대를 위해 강원도 일대를 순회한 직후인 10월 초순부터 철원(鐵原)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자금모집은 주로 부호(富豪)를 상대로 한 것이었는데 당시 일제식민권력에 안주하던 친일부호(親日富豪)의 외면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뿐아니라 1920년 1월 20일경 친일부호(親日富豪)의 밀고로 조종대(趙鍾大)가 일경에 피체되었고,l05) 이로인하여 결국 강원도단의 조직도 발각되고 말았다.

 
 
 
 
5.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해체(解體)와 이후의 활동(活動)
 
  11월 20일에 신현구(申鉉九)가 피체되었을 때만해도 애국단의 조직이 발각되지 않았으나 조종대(趙鍾大)가 철원(鐵原)에서 피체된 직후 1920년 1월 말경 강원도단이 발각되었고, 이어 충청도의 문봉의(文鳳儀) 계통조직과 전라도의 조직도 발각되면서 애국단은 자연 해체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렇듯 애국단의 조직이 대부분 발각되는 상황에서도 애국단의 일부 인사와 애국단의 조직을 계승한 혈복단에 의해 그의 활동을 계속 전개해 갔다. 앞에서 본 바처럼 혈복단은 신현구(申鉉九)의 피체로 애국단의 지도부에 공백이 생기게 되자 그의 조직을 계승 발전시켜 갔던 조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혈복단은 임시정부 특파원의 가세로 인하여 더욱 임시정부와 밀착된 성격(性格)을 갖는 것이었다.l06) 뿐아니라 혈복단은 애국단이 해체된 이후 새로운 조직으로 확대해 갔는데, 그러한 사실은 수원(水原)의 혈복단(血復團)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107)
  수원(水原)의 혈복단(血復團)(구국민단(救國民團)으로 개칭(改稱))은 휘문고보생(徽文高普生) 박선태(朴善泰)·이득수(李得洙)·윤익중(尹益重) 등이108) 임시정부의 지원을 목적으로 수원(水原) 삼일여학교(三一女學校) 출신 여학생(女學生)을 주도하여 1920년 6월경 조직한 학생비밀결사(學生秘密決社)였다.l09) 주요 활동은 임시정부의 선전 및 <독립신문(獨立新聞)>·<대한민보(大韓民報)>등의 배포를 통한 독립의식의 고양이었다. 그리고 조직은 단장(團長)(박선태(朴善泰))·부단장(副團長)(이득수(李得洙)) 아래 서무부장(庶務部長)(임순남(林順南))·재무부장(財務部長)(최문순(崔文順))·구제부장(救濟部長)(이선경(李善卿)) 등으로110) 애국단의 구성과 구제부(救濟部)만 특이할 뿐111) 비슷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구국민단(救國民團)이 중앙의 혈복단(血復團)과 어느만큼 밀접하게 연결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으나, 박선태(朴善泰)·이득수(李得洙)와 휘문고보(徽文高普) 동창으로 구국민단(救國民團)에 참여했던 윤익중(尹益重)이 애국단의 서병철(徐丙轍)과 암살단(暗殺團)의 조직에 합류하는 사실이 주목된다.
  김상옥(金相玉)·김동순(金東淳)·윤익중(尹益重) 등의 주도로 1920년 5월경 조직되었던 암살단(暗殺團)은 일제 관공서의 파괴 및 일제 요인과 친일파의 처단을 목적한 의협투쟁의 결사였다.112) 이때 윤익중(尹益重)은 동단의 외교부장(外交部長)을 맡았는데,113) 김상옥(金相玉)과는 일찍부터 동지적 결합을 이루던 사이로114) 김상옥(金相玉)과 김동순(金東淳)을 연결시킴으로써 암살단(暗殺團)을 조직케 했다.115) 또한 이러한 암살단(暗殺團)에 혈복단(血復團)의 김교상(金敎爽) ·김교선(金敎善) 형제는 암살단취지서(暗殺團趣旨書)를 인쇄하는 등 그의 지원활동을 펐다.116)
  그리고 김교상(金敎爽) 형제는 동년 8월 암살단(暗殺團)이 발각된 후에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국내조직과도 연결되어 활동을 펴나갔다.117) 3·1운동 직후 박장호(朴長浩) 등의 의병적 인사가 만주(滿洲)에서 결성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은 원래 복벽적(復的) 이념(理念)을 갖는 무장단체였다.118) 그러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국내의 조직을 확보해가는 과정에서 복벽적(復的) 이념(理念)은 임시정부의 공화적(共和的) 이념(理念)으로 전환되어 갔지만119) 여전히 무장투쟁의 성격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와같이 애국단의 발각이후 대부분의 인사가 피체되었지만 나머지 인사들에 의해 애국단의 활동은 계승되어 갔다. 그리하여 암살단(暗殺團) 또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같은 무장투쟁단체를 결성하거나 가입하면서 투쟁방략을 강화해 갔다. 이러한 투쟁방략의 전환은 3·1운동 이후 국내에 결성되었던 전국적 규모의 독립운동단체들이 1919년 말부터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 파괴당하는 속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이 시위적 성격이나 단순한 지원활동을 벗어나 무장투쟁으로 바뀌어 가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여기에 박건병(朴健秉)·오세덕(吳世德) 등의 상해망명(上海亡命) 및 옥고를 치른후 시베리아 방면에서 활동했던 김영학(金永鶴) 등의 활동을 통해서도120) 애국단의 독립운동은 계승되어 갔다.
 
 
 
 
6. 맺 음 말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은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敎師)였던 신현구(申鉉九)가 주도하여 1919년 4월부터 추진하여 동년 5월에 결성되었던 것으로 서울의 본부(本部)를 중심으로 강원도(江原道)·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 등지에 지단(支團)을 갖고 그 아래 군단(郡團)까지 두었던 임시정부(臨時政府) 지원단체(支援團體)였다.
  그의 성격(性格)을 이념(理念)·조직(組織)·활동상(活動上)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념상(理念上)의 특징으로는, 본부조직(本部組織)과 강원도단(江原道團)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구성원의 대부분이 신교육(新敎育)을 받았거나 기독교인(基督敎人)이었다는 점과 그리고 강령같은 문서(文書)는 발견되지 않지만 애국단의 행동 지침이 임시정부(臨時政府)에 대한 지원(支援)을 내세우고 있는 것 등으로 보아 자유주의(自由主義) 이념(理念)이 분명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에는 기독교인사(基督敎人士)가 주축이 되었던 강원도단(江原道團)이 불교(佛敎) 사찰(寺刹)인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결성됐다는 점과 또, 신상완(申尙玩)·탁능허(卓能虛)·이운파(李雲坡) 등의 불교(佛敎) 승려(僧侶)가 관련된 것으로 보아 종교적 한계도 초월한 독립운동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 당시 민족주의(民族主義)의 특성을 찾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조직상(組織上)의 특징을 보면 첫째, 본부조직의 결성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애국단은 3·1운동 뒤에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자생적(自生的)으로 생겨났다는 점이다. 그런데 결성 초기부터 임시정부(臨時政府)와 연결되었고, 이후 애국단의 행동 지침이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이었던 것으로 보아 임시정부(臨時政府)와의 관계가 깊은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애국단의 지단(支團)이 강원도(江原道)·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 등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전국적(全國的)인 조직(組織)을 계획했던 것 같다. 그러한 것은 충청도단(忠淸道團)의 조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서산(瑞山)의 안면도지단(安眠島支團)을 통해 평양(平壤)의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과 관계가 깊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세째, 애국단의 부서(部署)는 재무(財務)·서무(庶務)·통신(通信)·외교(外交)·학무(學務)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애국만이 임시정부(臨時政府)에 대한 비무장적인 지원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네째, 애국단의 인원 구성을 볼 때 연령별로는 20대(代)에서 40대(代)의 청장년층(靑壯年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고, 이들의 대부분은 신교육(新敎育)을 받았다. 그리고 직업으로는 목사(牧師)·전도사(傳道師)·승려(僧侶)·의생(醫生)·약종상(藥種商)·양조업(釀造業)·교사(敎師)·학생(學生)·목재상(木材商) 등 다양했고, 또 농업인 경우에도 단원이 직접 자금을 제공했던 점으로 미루어 중농(中農) 이상의 규모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들이 갖는 사회경제적 위치는 중산층(中産層)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강원도단의 평창군단(平昌郡團)에서 이식계(利殖契)를 위장한 창일계(昌一契)를 별동조직(別動組織)으로 구성하여 농민층(農民層)에 조직을 확대해 갔던 사실은 당시 애국단이 대중적(大衆的) 기반(基盤)에 접근했던 조직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섯째, 애국단 단장(團長) 신현구(申鉉九)가 1919년 11월 20일에 일경에 피체됨에 따라 애국단의 지도부에 공백이 생기게 되자 애국단 본부의 나머지 인사(人士)는 임시정부(臨時政府) 특파원(特派員) 김태원(金泰源)· 신봉균(申鳳均) 등과 합세하여 혈복단(血復團)을 결성했다. 따라서 혈복단(血復團)은 애국단의 후계조직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는데, 1920년 초 강원도단을 비롯한 애국단의 인사(人士)가 대부분 발각될 때에도 탄로나지 않고 구국민단(救國民團)등 새로운 조직으로 확대해 갔다.
  끝으로 활동상(活動上)의 특징을 보면, 먼저 연통제(聯通制)의 역할(役割)을 수행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연통부(聯通府)는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국내 조직으로 중부 이북지방에서는 그 활동이 활발했으나 중부 이남에는 거의 설치되지 못했는데, 애국단의 서울 본부(本部)를 비롯한 지방조직이 그 역할을 대행했다.
  그리고 애국단의 독립시위는 본부(本部)와 강원도단(江原道團)에서 각기 추진되었다. 불교(佛敎) 승려(僧侶) 출신으로 임시정부 특파원이었던 신상완(申尙玩)의 관여로 1919년 10월 10일에 거행되었던 강원도단의 시위는 3·1운동 직후에 여러 곳에서 탄생한 몇가지 임시정부가 9월 6일 통합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동포들이, 당시 몇 곳에 수립되었던 임시정부에 대한 통합정부의 수립을 열망했던 반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본부(本部)의 시위는 서울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하여 3·1운동과 같은 독립시위를 계획한 것이었다. 이 계획은 비록 예정대로 실행되지는 못했더라도 연합시위를 추진했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같은 애국단의 활동은 무장적인 투쟁은 아니었다. 그런데 애국단이 발각된 후 나머지 인사들은 암살단(暗殺團) 또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같은 무장단체의 결성이나 활동에 합류하면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해 갔다. 이는 3·1운동 이후 생겨났던 국내 독립운동단체가 대개 1919년 말부터 파괴당하는 속에서 점차 투쟁 양상이 무장항쟁으로 변천되어 갔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함께 무장투쟁을 표방하면서 점차 그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겨 갔던 문제는 다음의 연구과제로 남는다.

 
 
 
 


* 주 석 *

* 본연구소(本硏究所) 연구원(硏究員)
1. 이러한 국내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연구로는 박용옥(朴容玉), <1920년대초(年代初) 항일부녀단체(抗日婦女團體) 지도층(指導層) 형성(形成)과 사상(思想)>, 《역사학보(歷史學報)》69, 1976 ; 동(同),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김마리아>, 《나라사랑》30집, 1978과 신복용(申福龍), 《대동단실기(大同團實記)》, 양영각(養英閣), 1982가 있는 정도이다.
2. 대한독립애국단에 대한 선행연구로는 조추동걸(趙東杰) 교수의 《태백항일사(太白抗日史)》, (강원일보사(江原日報社), 1976)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저서의 성격상 주로 강원도지방의 항일운동을 다루는 것이었고, 또 대한독립애국단의 활동이 강원도에서 가장 활발했던 관계로 강원도의 애국단인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
3. 신용하(愼鏞夏), <3·1독립운동(獨立運動)의 사회사(社會史)>,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 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1986.1, 364~367면.
4. 조동걸(趙東杰),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조직(組織)>(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한국사론(韓國史論)》 10, 1985.4, 70∼73면),
5. 이는 임시의정원법(臨時議政院法)이 제정된 후 처음 열린 임시의정원회의(臨時議政院會議)였다.
6. 국회도서관편(國會圖書館編),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1974.9, 47~48면.
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9집, 1011면(신현구(申鉉九)·김상덕(金相德) 등의 판결문(判決文)).
8. 주요한 편저(編著),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1963, 195~196면. 도산(島山)이 상해(上海)에 도착한 내무총장(內務總長)에 취임한 것은 동년 6월 28일의 일이었다. 그동안 그는 여행의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적십자 병원에서 휴식을 취하며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하였다.
9.《독립운동사자료집》 9집, 99면 및 1019~1920면.
10. 김상덕(金相德)이 애국단의 설치를 위해 철원(鐵原)의 박연서(朴淵瑞) 등에게 애국단의 설립취지를 설명할 때, 1) 상해(上海)의 임시정부(臨時政府)에 국내 독립운동의 정세보고 2) 임시정부의 문서 배포 및 시위의 전개와 운동자료모집 3) 독립 달성후 국내 행정기관 역할의 수행 등이 그의 주요 임무임을 밝히고 있다. (《독립운동사료집》 9집, 993면).
11. 위의 자료집, 999면 및 1009면. 이러한 전라도(全羅道) 방면의 활동도 8월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지원을 내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12. 신공철씨(申公澈氏)(70. 신현구(申鉉九)의 삼남(三男), 전광복회이사(前光復會理事), 현재 (現在) 경기도(京畿道) 광명시(光明市) 철산동(鐵山洞) 56~103 거주(居住))의 증언(證言)(1987.4.8)에 따르면 이때 신현구(申鉉九)는 논산(論山)의 각처에 개척교회(開拓敎會)를 세우고 전도사업(傳道事業)을 벌였다고 한다.
13.《영명팔십년사(永明八十年史)》, 1985. 10, 147면에 있는 1910년 당시 졸업생기념 사진(寫眞)을 통해 신현구(申鉉九)가 동교(同校)에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이규갑(李奎甲) 및 동교(同校)졸업생 가운데 조병옥(趙炳玉) 등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14. 신현구(申鉉九)가 언제 서울에 왔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다만 Williams와 친밀한 교류를 가졌다는 점으로 보아Williams가 미국(美國)으로 돌아가는 1913년 경을 전후한 시기에 상경(上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스도 회보》1913.2.15일자 기사에 Williams의 미국행(美國行) 보도)
15. 권인채(權仁采)는 애국단의 초기활동에서 주목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행적이 확실치 않다. 신현구(申鉉九)와는 어떠한 사이였는지, 또 임시정부(臨時政府)와 언제부터 연결되었는지 뚜렷하지 않다. 1919년 11월에 작성된 임시정부의 조사원(調査員) 명부에 의하면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조사원(調査員)으로 활동한 기록이 있고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60면), 그 후에는 변절(變節)하여 만주제국협화회(滿洲帝國協和會)에 가담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만주제국협화회(滿洲帝國協和會), 《강덕팔년도전국연합협의회간담회기록(康德八年度全國聯合協議會懇談會記錄)》, 133∼134면.)
당시 임시정부(臨時政府)에서는 국내의 제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원(調査員)을 두었는데, 대부분 그 지역 출신의 국내인사를 임명하였다. 따라서 권인채(權仁采)가 부여(扶餘) 출신이었음을 알수 있고, 또한 후술하는 바와같이 김상덕(金相德)(연희전문학생(延禧專門學生)과 애국단이 결성 이전부터 교류를 가졌던 점으로 미루어 신교육(新敎育)을 받은 청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애국단의 결성과정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그가 1919년 10월경을 전후해서는 별다른 활동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앞의 판결문(判決文) 참조) 이는 만주제국협화회(滿洲帝國協和會)에 가담한 사실과 함께 신현구(申鉉九)가 권인채(權仁采)의 변절로 인하여 애국단의 운영에 곤란을 겪었다는 증언(證言)(신공철(申公澈))을 감안할 때 이 무렵 변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16. 이때 신현구(申鉉九)가 안창호(安昌浩)로부터 받았던 감사장은 후일 애국단의 조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애국단의 근거로서 사용되어졌다.
17. 앞의 판결문(判決文) 참조.
18. 위와 같음.
19. 본부 구성원의 인적사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성 명
나 이
직 업
본 적
주 소
직 책
비 고
신현구(申鉉九)
39
무직(남감리교회신도) 충남 논산 부적 안천 서울 옥천동(玉川洞) 단장 1931년 순국
권인채(權仁采)
  충남 부여 만주(滿洲)(?)   1919.11 현재 임시정부(臨時政府) 조사원(調査員)(충남부여군(忠南扶餘郡))
안황(安滉)
        혈복단(血復團)참여
김순호(金順皓)
중앙학교생
(中央學校生)
    재무총장  
김영식(金永植)
23
농업 전남 장성 황룡 금호 인천부 율목리(栗木里) 전라도조직활동  
서병철(徐丙轍)
29
무직 충남 서산 해미 서울 효제동   1920.5 암살단(暗殺團)에 참여
문봉의(文鳳儀)
43
약종상 충남 서산 안면 서울 봉래동 재무감독  
김상덕(金相德) (재근(載根))
26
연희전문학교생 강원 김화 김화   강원도 조직담당  
이시우(李時雨)
30
  전남 나주 영산 대기 서울 낙원동 충청도조직활동  
안교일(安敎一)
33
이화학교 부속여학교 교사 서울 창신동 좌동   혈복단(血復團)·대동단(大同團)과 연결
김영철(金永喆)
23
경성의학전문학교생 경북 영일 흥해 학성     대동단(大同團)과 연결
신현창(申鉉彰)
29
의사

충남 논산 부적 안천

상해(上海) 상해(上海) 파견활동  
  참고) 나이·주소는 1920년을 기준했음.
20. 신현창(申鉉彰)은 상해(上海)로 넘어간 후 애국단과의 연락을 맡는 한편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충청남도대의원(忠淸南道代議員)·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상임위원(常任委員) ·노병회이사(勞兵會理事) 등으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사자료집》7집, 1307면 및 《독립운동사》4권, 474면)
21.《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48면. 1919년 7월 25일 현재 애국단은 신현구(申鉉九)를 대표(代表)로 하여(통신처:서울 화천정(和泉町) 114 신통(申通)앞) 임시정부와 연락을 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2. 조동걸(趙東杰), 《태백항일사(太白抗日史)》, 239면.
2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집(3·1운동 재판기록), 59면 및 89면.
24.《독립운동사자료집》9집, 1004면.
25. 위의 자료집, 1004~1005면.
26. 위와 같음.
27. 조동걸(趙東杰), <삼일운동(三一運動)의 지방사적(地方史的) 성격(性格)>-강원도(江原道) 지방(地方)을 중심(中心)으로-, 《역사학보(歷史學報)》제사십칠집(第四十七輯), 1970.10, 105면. 이 무렵 강원도의 교통은 춘천(春川)(소양강창(昭陽江倉))의 북한강조운(北漢江漕運), 원주(原州)(흥원창(興元倉))의 남한강조운(南漢江漕運)을 따라 선편(船便)으로 중앙(中央)과 연결되었고 영동(嶺東) 지방(地方)에서는 일단 선vus으로 원산(元山)에 가서 원산(元山)에서 경원선(京元線)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영동(嶺東)과 영서(嶺西)의 교류(交流)는 산길을 따라 이루어졌다.
28. 최승순(崔承洵), 《태백(太白)의 산하(山河)》, 강원일보사(江原日報社), 1973, 267면.
29. 일찌기 철원(鐵原)에는 배영학교(培英學校)를 비롯하여 봉명학교(鳳鳴學校), 그리고 배영학교(培英學校)가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페교된 후 세워진 정의학교(貞義學校), 감리교회에서 세운 전정의숙(專政義塾) 등이 있었다. (《독립운동사》2권, 531∼532면)
30. 강동진(姜東鎭), <일제지배하(日帝支配下)의 노동야학(勞動夜學)>, 《역사학보(歷史學報)》 제사십륙집(第四十六輯), 1970.8, 10면. 당시 강원도에 설치된 노동야학(勞動夜學)은 철원(鐵原)·강릉(江陵) 두 곳 뿐이었는데 이같은 노동야학(勞動夜學)은 민족사상(民族思想)의 온상지가 되었다.
31. 조동걸(趙東杰), <삼일운동(三一運動)의 지방사적(地方史的) 성격(性格)>, 120면.
32.《독립운동사》2권, 532∼533면.
33. 조동걸(趙東杰), 《태백(太白)의 역사(歷史)》, 1973, 252면.
34. 강대여(姜大呂)는 경성사립기호학교(京城私立畿湖學校)를 수료하고 배영학교(培英學校)에서 교육활동을 했으며, 박건병(朴健秉)은 경성청년학교(京城靑年學校)를 나와 교육사업에 종사했고, 이용우(李用雨)는 관립(官立) 한성학교(漢城學校)를, 오세덕(吳世德)은 경성고보(京城高普)를 각각 졸업했다. 그리고 김철회(金喆會)는 배영학교(培英學校)의 교장(校長)을 지냈고, 철원남감리교회(鐵原南監理敎會)의 예배당(禮拜堂)을 세웠다. (《향토지(鄕土誌)》(철원(鐵原)·금화(金化)·평강(平康)), 1977.12, 595∼598면.)
35. 조동걸(趙東杰), <삼일운동(三一運動)의 지방사적(地方史的) 성격(性格)>, 108면.
36. 조동걸(趙東杰), 위의 논문,116∼117면. 불교(佛敎)를 제외하더라도 강원도의 3·1운동은 청년(靑年)이 연합(聯合)했던 소수의 경우를 빼고는 천도교(天道敎)·기독교(基督敎)·유교(儒敎)측이 각기 단독으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37. 불교승려가 철원군단(鐵原郡團)의 결성에 참여 했던가에 관심을 갖고 조사를 진행해 보았는데, 그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을 찾지는 못했어도 판결문(判決文)을 통해 건봉사(乾鳳寺)의 탁능처(卓能處)·이운파(李雲坡) 등이 강원도단에 관여한 흔적을 살필 수 있다.
38. 보통 철원(鐵原)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본적이 황해도(黃海道) 금천군(金川郡) 금천면(金川面) 금릉리(金陵里) 210(<판결문(判決文)>참조)인 것으로 보아 금천(金川)에서 출생한 후에 철원(鐵原)으로 이주(移住)했던 것 같다.
39.《독립운동사》 2권, 531면.
40. 나병규(羅炳圭)의 소개로 상동교회(尙洞敎會)에 참여한 기록이 보이는데 (《기독교대백과사전》 13권,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1984.8, 1239면), 나병규(羅炳圭)는 조종대(趙鍾大)가 강원도(江原道)의 조직을 확대할 때 그의 지원활동을 폈다(《독립운동사자료집》 9집, 995면 및 1000면)
41. 위의 자료집, 994면.
42.《조선병합십년사(朝鮮倂合十年史)》, 1922, 567면.
43. 강원도단(江原道團)의 통신국장(通信局長) 박연서(朴淵瑞)가 화천(華川)으로 전임됨에 따라 김철회(金喆會)가 후임 통신국장(通信局長)을 맡았다.
44. 이때 조종대(趙鍾大)의 활동 경로에서 화천(華川) ·춘천(春川) 등지의 강원도 중부지방이 빠져 있는데, 이 지역은 9월초 화천(華川)으로 전임되었던 박연서(朴淵瑞)가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45. 3·1운동때 원주(原州)의 감리교회(監理敎會)에서는 만세운동의 계획을 미선교사(美宣敎師)가 일본헌병대(日本憲兵隊)에 밀고함으로써 거사를 좌절케 한 일이 있었다. (조선헌병대사령부(朝鮮憲兵隊司令部), 《대정팔년(大正八年)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 336면.)
46. 울진(蔚珍)·삼척(三陟)·평해(平海)는 감리교(監理敎)의 구역상 강릉(江陵)에 포함된 지역이었다 (《그리스도회보》1913.10.27). 이러한 이유로 엄정섭(嚴正燮)으로 하여금 이 지역을 맡게 했던 것 같다. 또 조종대(趙鍾大)가 엄성훈 (嚴成勳)에게 안경록(安慶錄)의 설득을 종용했던것을 보면 이들 부자(父子)도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47. 이때 도단(道團)에서는 동년 10월 1일·2일 두차례에 걸쳐 엄성훈(嚴成勳) 부자(父子)에게 활동비 100원을 지원하였다. (《조선병합십년사(朝鮮倂合十年史)》, 569면.)
48. 조동걸(趙東杰), 《태백항일사(太白抗日史)》, 243면.
49. 조선남감리교회전도국(朝鮮南監理敎會傳道局), 《조선남감리교회삼십년기념보(朝鮮南監理敎會三十年紀念報)》, 1930, 169∼170면.
50. 암호의 주신 방법은 모음을 로마숫자로, 자음을 한자(漢字)의 숫자로 표기하고 일정한 순서에 의해 뜻을 정하도록 하였다. (《독립운동사자료집》 9집, 1014년~1015면).
51.《조선병합십년사(朝鮮倂合十年史)》, 570면.
52. 이근옥(李根玉)은 3·1운동때 양양(襄陽)의 토성면(土城面) 일대(一帶)에 선전지(宣傳紙)와 전단(傳單)을 배포하면서 항쟁(抗爭)했던 열혈지사(熱血志士)였다. (조동걸(趙東杰),《태백항일사(太白抗日史)》, 243면 및 앞의 판결문)
53. 이들이 애국단 본부를 찾을 수 없었던 데에는 주(註) 15와 같이 권인채(權仁采)의 변절로 인하여 애국단 본부가 발각될 처지에서 피신하였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54.《대정팔년(大正八年)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 331∼332면.
55. 강원도단원의 인적사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성 명
나 이
직 업
본 적
주 소
직 책
비 고
박연서(朴淵瑞)
29
목 사
강원 철원 철원
강원 화천
통신국장 화천(華川)으로 전임함에 따라 통신국장사임 배영학교(培英學校) 교사
강대여(姜大呂)
31
대 서 업
〃
좌동

서무국장

배영학교(培英學校) 교사
김철회(金喆會)
44
농 업
〃
〃
외교국장, 통신국장 배영학교(培英學校)에 관계, 철원교회당 설립
이봉하(李鳳夏)
34
농 업
〃
〃
도단장 復團)참여
김완호(金完鎬)
26
포 목 상
〃
〃
재무국장  
이용우(李用雨)
29
양 조 업
〃
〃
외교국장(부단장)  
박건병(朴建秉)
〃
상해(上海)
학무국장 임시의정원의원, 국민대표회준비위원 역임
오세덕(吳世德)
24
서 ///울
〃
외교국원 1922. 상해법정대학(上海法廷大學)졸업
이연수(李延洙)
30
의 생
강원 철원 철원
좌 동
도단원(본부 연락담당)  
조종대(趙鍾大)
48
전 도 사
황해 금천 금천
강원도조직책 1922 옥중순국
신순풍(申順豊)
30
철 원 면
서 기
강원 철원 철원
좌 동
도단원  
엄성훈(嚴成勳)
48
목 재 상

〃

강원 강릉 강릉
강릉군단장  
엄정섭(嚴正燮)
〃
〃
강릉군단원 엄성훈(嚴成勳)의
자(子)
이근세(李根世)
48
농 업
강원 평창 평창
좌 동
평창군단장 창일계(昌一契) 조직
이기헌(李起憲)
38
의 생
(약종상)
〃
〃
평창군단통신원  
조두환(曺斗煥)
42
농 업
〃
〃
평창군단원  
고제낙(高濟洛)
46
농 업
〃
〃
〃
 
김용준(金容俊)
목 사
〃
 
김지용(金趾容)
〃
 
김영학(金永鶴)
44
목 사
황해 금천 조포
강원 양양 양양
양양군단장 1932 시베리아에서
순국
김형석(金亨錫)
44
농 어 업
강원 양양 토성
좌 동
양양군단원  
이근옥(李根玉)
37
농 업
〃
〃
〃
상해투신계획
이석규(李錫圭)
27
〃
〃
〃
〃
〃
김연수(金延洙)
26
〃
〃
〃
〃
〃
문명섭(文命燮)
21
〃
〃
〃
〃
〃
56. 이시우(李時雨)는 애국단에 가입하기 이전부터 별도의 조직을 통해 자금모집 활동을 벌였다. (강덕상(姜德相),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25, 534면)
57. 판결문(判決文)을 보면 도단장(道團長)·군단장(郡團長)에 유환방(兪煥邦)(부(父))·유경재(兪暻在)(자(子))가 엇갈려 나오는데 유경재(兪暻在)가 서울을 빈번히 왕래하며 활동했던 점으로 보아 아들인 유경재(兪暻在)가 도단장(道團長)의 일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서승렬(徐承烈)은 유경재(兪暻在)의 매부(妹夫)로 유경재(兪暻在)의 권유로 애국단에 가입하여 문봉의(文鳳儀) 등에게 자금지원 활동을 폈다.
58.《독립운동사》3권, 144면.
59.《독립운동사자료집》10집, 1051면 및 1059면.
60. 위의 자료집, 1052면.
61. 김정명편(金正明編),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제1권 분책, 321~323면.
62.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은 상해(上海)의 임시정부(臨時政府)와의 통신연락, 자금지원, 비밀출판 등을 통해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무렵 결성되었던 평양(平壤)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김정명편(金正明編),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제1권 분책 , 225∼230면.)
63. 서병철(徐丙轍)의 위촉으로 이종성(李鍾聲)이 충청도(忠淸道) 방면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서는 이종성(李鍾聲)과 함께 유택보(兪宅寶)를 공주(公洲) 영명학교(永明學校)로 보내 자금을 모집케 했다. (위의 책, 228면).
64. 이종성(李鍾聲)은 충북(忠北) 진천(鎭川) 출신으로 황해도(黃海道) 신계군(新溪郡) 소재 기독교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했고, 한국태(韓國泰)는 함북(咸北) 출신이었다.
65. 위의 책, 322면.
66. 신봉균(申鳳均)은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서울 특파원(特派員)이었다. (《조선민족운동년감(朝鮮民族運動年鑑)》, 63면).
67.《동아일보(東亞日報)》 1921.6.26.
68. 김태원(金泰源)은 7월 23일, 신봉균(申鳳均)은 7훨 26일에 국내에 특파되었다. 이때 김태원(金泰源)은 안창호(安昌浩)의 지시로 신현구(申鉉九)틀 찾았는데 이무렵 신현구(申鉉九)한테는 임시정부로부터 연통제(聯通制)에 관한 서류가 도착해 있었다. (《독립운동사자료집》 10집, 1066면)
69. 혈복단(血復團)은 임시 정부의 선전 및 통신연락·문서 살포·독립시위 전개 등이 주요 목적이었는데, 다만 구성원의 성격상 애국단에 비해 더욱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갔던 것 같다.
70. 신공철씨(申公澈氏)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돌날인 1919.11.21을 하루 앞둔 11.20에 신현구(申鉉九)가 피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증언은 당시 상황과 결부시켜 볼 때 타당성이 있다. 첫째 후술하는 바와 같이 신현구(申鉉九)가 11. 초부터 독립시위를 추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거사 당일인 11.28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 둘째 그런데 11.28 시위현장에서 피체되었던 다른 인사들과 함께 12. 초에 일경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음을 볼 수 있고(강덕상(姜德相)《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25, 618∼619), 셋째 애국단 판결문에서 다른 단원(團員)들은 미결일수가 50일 내지 100일인데 비해 신현구(申鉉九)만이 200일이었던 점, 그리고 신현구(申鉉九)가 소위 대동단(大同團) 사건에 연루되어 판결을 받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신현구(申鉉九)는 시위를 추진하는 도중 당시 대동단(大同團)이 주도한 의친왕 상해망명계획이 발각되면서 대부분의 대동단(大同團) 인사(人士)들이 피체될 때 이에 연루되어 11.20에 피체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71.《독립운동사자료집》 10집, 1045면.
72.《독립운동사자료집》 10집, 1051면. 김태원(金泰源)은 논산(論山)의 홍진유(洪鎭裕)에게 혈복단(血復團) 규칙서수십매를 건내주고 논산(論山) 일대에 혈복단(血復團)의 조직을 확대할 것을 지시했다. 《동아일보(東亞日報)》1921.6.26).
73.《독립운동사자료집》 9집, 1001면.
74. 강대직(姜大直)은 연통제(聯通制)의 전북지역(全北地域) 고문(顧問)을 맡고 있던 인물이다. (《조선민족독립연감(朝鮮民族獨立年鑑)》, 45면)
75. 《독립운동사자료집》 9집, 999면
76. 충청도 및 전라도단원의 인적사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성 명
나 이
직 업
본 적
주 소
직 책
비 고
유경재(兪暻在)
21
무 직
충남 청양 대치
좌 동
충청남도단장  
유환방(兪煥邦)
58
농업
〃
〃
청양군단장  
정상길(鄭相吉)
25
농 업
충남 청양 비봉
〃
청양군단원  
서승열(徐承烈)
34
농 업
충남 청양 운곡
〃
청양군단원  
임정현(林禎鉉)
충남 서산 안면
〃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
가재창(賈在昌)
24
농 업
〃
〃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 서병철(徐炳轍)과 동서(同)사이
홍진유(洪鎭裕)
/
농 업
충남 논산 연산
  혈복단(血復團)
강대선(姜大宣)
24
〃
전북 고창 성송
〃
고창군단원  
유희영(柳熙榮)
31
〃
〃
〃
〃
주로 서울에서 활동
박인식(朴仁植)
배재고보생(培材高普生)
 
서 울
전라도단활동  
이기하(李起河)
43
농업
전남 장성 삼계 서울 낙원동
〃
 
77. 국회도서관편(國會圖書館編),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中國編)), 1976, 76∼78면. 이러한 연통제(聯通制)의 목적은 1919년 7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원령(大韓民國臨時政府國務院令) 제일호(第一號)로 공포된 임시연통제(臨時聯通制)의 제일조(第一條)에 명기되어 있다.
78. 이연복(李延馥),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교통국(交通局)과 연통제(聯通制)>(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한국사론(韓國史論)》10, 110~111면).
79.《동아일보(東亞日報)》 1921년 6월 26일. 이 때 김태원(金泰源)은 신현구(申鉉九)로부터 연통제(聯通制) 규칙서세통을 받아 김교상(金敎爽) ·김순호(金順皓) 등에게 교부하였고, 동년 11월경 동 규칙서에 의거하여 혈복단(血復團)을 조직하였다.
80. 연통제(聯通制)의 초기 조직은 각도(各道)에 감독부(監督府)(감독(監督)), 각군(各郡)에 총감부(總監府)(총감(總監)), 각면(各面)에 사감부(司監府)(사감(司監))를, 애국단은 본부조직(本部組織)아래 도단(道團)(도단장(道團長))·군단(郡團)(군단장(郡團長))·면단(面團)을 두었다.
81. 강덕상(姜德相),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6, 273∼290면 참조. 임시정부의 통합을 축 하하는 시위와 더불어 국치일(國恥日)인 8월 29일, 일제(日帝)신임총독 재등실(齋藤實)의 도착일인 8월 31일, 일제의 소위 시정기념일(始政紀念日)인 10월 1일 그리고 일제의 천장절(天長節)인 10월 31일 등을 기해 전국 각처에서는 시위의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82. 조종대(趙鍾大)가 강원도의 조직 확대에 착수했던 때가 9월 26일 경이었으므로 9월 중순부터 진행되었던 시위 계획에 군단(郡團)이 참여할 수 없었다. 즉 조종대(趙鍾大)의 주도로 강원도의 조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한편으로 철원(鐵原)의 강원도단(江原道團)에서는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83. 처음에는 10.3을 거사일로 정하였으나, 서울로부터 태극기·선언서 등이 늦게 전달됨에 따라 10.10에 시위를 거행했다.
84. 이때 박건병(朴健秉)·오세덕(吳世德)의 상해망명(上海亡命)에 따른 경비는 철원애국단에서 지원하였다.
85. 당시 상해(上海)의 《독립신문(獨立新聞)》(1919년 11월 4일자)에서도 철원(鐵原)의 시위상황을 보도하고 있음을 볼수 있는데, 일경(日警)측에서 시위의 주체가 애국단(愛國團)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애국단이 발각된 후의 일이었다.
86. 이때 선언서의 인쇄는 강대여(姜大呂)의 지시에 의해 단원 신순풍(申順豊)(철원면서기)이 철원면사무소(鐵原面事務所)의 등사기를 이용하여 인쇄하였다.
87.《독립신문(獨立新聞)》, 1919년 11월 4일자 참조.
88.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경무국(警務局), 《고등경찰관계년표(高等警察關係年表)》, 1930, 10면.
89.《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68면.
90. 신숙(申肅), 《나의 일생(一生)》, 1963, 63∼64면. 당시 선출되었던 준비위원(準備委員) 5인(人) 가운데 박용만(朴容萬)·박건병(朴健秉)·김세준(金世俊) 등 3인(人)이 철원 출신 인사였다.
91. 안계현(安啓賢), <3·1운동(運動)과 불교계(佛敎界)>, 《3·1운동(運動) 50주년기념논문집(週年紀念論文集)》, 169, 275∼276면. 당시 중앙학교(中央學校) 학생(學生)들은 유심회(維心會)를 조직하여 민족의식과 불교대중화에 힘을 쏟았는데, 신상윤(申尙玧)이 회장을 맡았고, 김상헌(金祥憲), 김법린(金法璘) 등이 실무를 보았다, 또 한용운(韓龍雲)의 지도로 잡지 《유심(維心)》을 발간했다.
92.《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62∼654면 참조. 신상완(申尙玩)은 안창호(安昌浩)를 조선불교청년연합회(朝鮮佛敎靑年聯合會)의 고문(顧問)으로 추대하는 등 상해(上海)에 있는 동안 잦은 교류를 가졌다.
93. <대동단(大同團) 예심결정서(豫審決定書)> (《대동단실기(大同團實記)》, 151면)
94.《독립운동사자료집》 9집, 1018∼1019면.
95. (대동단(大同團) 예심결정서(豫審決定書)), 151∼152면. 이때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은 시위의 추진에는 원칙적인 합의를 하였으나 선언서의 민족대표(民族代表)를 국내 인사로 할 것을 주장했다. 참고로 박은식(朴殷植) 등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명의한 민족대표(民族代表)는 박은식(朴殷植)·박환(朴桓) 박세충(朴世忠)·안정근(安定根)·안종술(安宗述)·조의홍(趙宜弘)·오능조(吳能祚)·허완(許玩)·최정식(崔正植)·최지화(崔志化)·도인권(都寅權)·정운시(鄭雲時)·연병우(延秉祐)·신태화(申泰和)·한우삼(韓于三)·고일청(高一淸)·이상로(李相老)·이낙순(李洛淳)·이병덕(李秉德)·이종오(李鍾旿)·이화숙(李華淑)·이근영(李根英)·명제세(明濟世)·김구(金九)·김희선(金羲善)·김경하(金景河)·김찬성(金燦星)·김가준(金可俊)·김기창(金基昶)·김철(金哲) 등 30인(人)이었다. (유광렬편(柳光烈編),《항일선언(抗日宣言) 창의문집(倡義文集)》, 1981. 12, 182∼184면 참조)
96. 김정명편(金正明編),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 1권 분책, 230∼231면.
97.《독립운동사》 4권, 445∼446면.
98.《독립신문(獨立新聞)》, 1920년 1월 1일자 참조. 이때 작성 배포한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은 의친왕(義親王)·김가진(金嘉鎭)·전협(全協)·양정(楊禎)·이정(李政) 김상설(金商說)·전상무(田相武)·백초월(白初月)·최전구(崔銓九)·조형구(趙炯九)·김익하(金益夏)·정설교(鄭卨敎)·이종춘(李種春)·김세응(金世應)·정의남(鄭義南)·나창헌(羅昌憲)·한기동(韓基東)·신도안(申道安)·이신애(李信愛)·한일호(韓逸浩)·박정선(朴貞善)·노홍제(魯弘濟)·이직현(李直鉉)·이래수(李來修)·김병기(金炳起)·이겸용(李謙容)·이소후(李宵喉)·신태련(申泰鍊)·신영철(申瑩澈)·오세덕(吳世德)·정규식(鄭奎植)·김횡진(金宖鎭)·염광록(廉光祿) 등이 었다. 이상에서 대동단(大同團)의 인사(人士)가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앞의(주(註)95) 민족대표와는 한 사람도 일치됨이 없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대동단(大同團)의 주도로 국내 인사를 중심한 인선(人選)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애국단 계열의 인사로는 10.10 시위 후 상해(上海)로 망명했던 강원도단의 오세덕(吳世德), 그리고 신현구(申鉉九)의 종질(從姪)로 임시정부 논산군(論山郡) 조사원(調査員)으로 활동하던 신형철(申瑩澈) 등이 보인다.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60~62면).
99. 이때 일제의 추격을 피해 계속 시위를 추진한 대동단(大同團)의 인사는 나창헌(羅昌憲)·이신애(李信愛)·이을규(李乙奎) 정도였다.
100. 안교일(安敎一)은 독립선언서 및 전단물(傳單物)의 인쇄 및 배포의 책임을 맡았고, 이신애(李信愛)는 행동대원을 규합했다. (<대동단사건판결문(大同團事件判決文)>, 《대동단실기(大同團實記)》, 176∼177면).
101. 김정명(金正明)의 앞의 책, 231∼232면. 안교일(安敎一)·이신애(李信愛) 등이 주도한 만세시위에 약200여명의 군중이 모였는데, 중심인물들은 모두 현장에서 피체되었다.
102. 이병헌(李炳憲), 《삼일운동비사(三·一運動秘史)》, 1959, 997∼1002면. 이신애(李信愛)는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와 대동단(大同團)에서 함께 활동했다.
101.《독립운동사자료집》 9집, 994면.
103.《독립운동사》 4권, 260면.
104. 조동걸(趙東杰), 《태백항일사(太白抗日史)》, 240면.
106. 혈복단(血複團)에는 애국단(愛國團)의 인사(人士) 외에 김태원(金泰源), 신봉균(申鳳均) 등 임시정부 특파원이 주도 참여했다.
107. 수원(水原)의 혈복단(血復團)이 중앙 혈복단의 하부조직의 성격을 띠고 있음은, 첫째 수원(水原) 혈복단(血復團)에 참여한 윤익중(尹益重)이 서병철(徐丙轍)과 같은 애국단 및 혈복단의 인사(人士)와 교류(交流)를 갖고 있었던 점 (《독립운동사》7권, 359∼361면), 둘째 서울에서 임시정부의 문서 및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받아와 배포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서울에 본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동아일보(東亞日報)》1921.4.6), 다음에 활동 방략 및 조직의 명칭이 동일하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8. 이들은 구국민단(救國民團)의 결성 이전부터 동지적 결합을 이루고 있었다. (《매일신보(每日新報)》, 1920년 11월13일 및 《휘문칠십년사(徽文七十年史)》158면)
109.《매일신보(每日申報)》, 1920년 11월 13일. 이때 박선태(朴善泰) 등이 삼일여학교(三一女學校) 출신 여학생(女學生)들을 동지로 규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삼일여학교(三一女學校) 교사 차인재(車仁載)의 역할이 컸다.
110.《동아일보(路東亞日報)》, 1921넌 4월 6일.
111. 구제부(救濟部)의 임무는 옥고를 치르는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보살피는 것이었다. 이같은 활동은 여학생(女學生)의 참여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112.《독립운동사자료집》10집, 1048면.
113. 위의 자료집, 1054면.
114.《독립운동사》7권, 359면. 윤익중(尹益重)·김상옥(金相玉) 등은 3·1운동 직후인 동년 4월 1일 항일결사 혁신단(革新團)을 조직,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선전하였다.
115. 위의 책, 360~361면. 길림군정서원(吉林軍政署員) 김동순(金東淳)이 1920.1초에 서울에 왔을 때, 윤익중(尹益重)의 친구인 박승목(朴勝睦)(당시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 참모(參謀) 박관해(朴寬海)의 아우)을 통해 김동순(金東淳)과 김상옥(金相玉)이 만나게 되었다.
116.《독립운동사자료집》10집, 1049면.
117. 김정명(金正明)의 앞의 책, 501~503면. 김교상(金敎爽)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김기한(金起漢) 등과 연결되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시행규령(施行規令) 및 포고문(布告文)을 인쇄하였다.
118. 김준엽(金俊燁) ·김창순(金昌順), 《한국공산주의운동사(韓國共産主義運動史)》4, 1974, 57∼61면.
119. 박영석(朴永錫), 《일제하독립운동사연구(日帝下獨立運動史硏究)》一 만주노령지역(滿洲露領地域)을 중심으로-, 1984, 45~51면.
120.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경무국(警務局), 《국외(國外)어(於)용의조선인명부(容疑朝鮮人名簿)》, 1934. 7,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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