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백과사전 인물자료
2004/5/5(수)
강원 독립운동 시작이자 중심,, 철원군단 (철원애국단)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조직적이고 체계적 활동을 했던 철원군단은 강원도단(江原道團)으로 승격.

김완호 [ 金完鎬 , ?~? ]

강원도 철원(鐵原) 출신으로, 생몰년이나 출생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1919년 5월 권인채(權仁采)·신현구(申鉉九)·김순호(金順皓)·문봉의(文鳳儀)·김상덕(金相德:일명 載根) 등이 서울에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을 조직한 뒤, 같은 해 8월 권인채·김상덕이 지부인 철원군단(鐵原郡團)을 결성하자 이에 참가해 재무과장(財務課長)으로 활약하였다.

철원군단은 특히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어서 곧 강원도단(江原道團)으로 승격되었는데, 철원애국단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세력이 막강하였다. 이때 김완호는 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같은 해 9월 신상완(申尙玩)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경축하기 위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계획을 듣고, 다음달 10일 철원읍의 만세운동을 주관하였다.

이후 강원도 지역에 있는 각 군의 조직 확대에 힘쓰던 중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박건병 [ 朴健秉 , 1892~? ]

강원도 철원(鐵原)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8월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김상덕(金相德)과 회합하고, 애국단의 강원도 지단인 철원군단(鐵原郡團:일명 철원애국단) 설치에 참여하여 학무과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수립 기념을 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 철원 일대에 전단지를 배포하고 사요리(四要里) 우시장에서 만세를 선창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1920년 1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강원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4월에는 각 독립단체의 통합을 위해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에서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이어 192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창조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한국독립유일당(韓國獨立唯一黨) 북경촉성회에서 장건상(張建相)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7년 11월에는 상하이·난징[南京]·광둥[廣東]·우한[武漢] 지역의 대표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독립당관내촉성연합회에 참가하여 역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 1928년 5월 전민족유일당조직회(全民族唯一黨組織會)에 참석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강대려 [ 姜大呂 , 1889.9.24~1959.12.2 ]

1889년(고종 26) 강원도 철원(鐵原)에서 태어났다. 1919년 8월 서울에서 온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단원 김재근(金載根)으로부터 대한독립애국단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틀 뒤인 11일 강원도 지단인 철원군단(鐵原郡團:일명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주요 회원은 김철회(金喆會)·박건병(朴健秉)·박연서(朴淵瑞) 등으로, 결성 당시 강대려는 서무과장으로 활약하면서 대한독립애국단의 설립 목적인 독립운동의 자금 조달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 국내 조직망을 통한 임시정부와의 연락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어 철원군단이 강원도단으로 승격되면서 서무국장으로 활약하였고, 1919년 9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파견한 신상완(申尙玩)으로부터 임시정부
수립 경축을 위한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다음달 10일 김완호(金完鎬) 등과 임시정부축하회를 열어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철원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관하였다.

이후 강원도 지역의 각 군의 조직 확대에 힘쓰던 중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철회 [ 金喆會 , ?~? ]  

강원 철원(鐵原) 출생. 철원에 배양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애국사상을 고취하다가 일제로부터 불온하다 하여 폐쇄당하였다. 그 뒤 동지들을 규합, 애국단을 조직하고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만기출옥하였다. 그 후 옥사한 동지 조종대(趙鍾大)의 시체를 비밀리에 인수·안장하였다 하여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 후 계속 사찰대상으로 감시를 받았다. 일본 고베[神戶]로 밀항, 지하공작을 하다가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조종대 [ 趙鍾大 , 1873.1.24~1922.7.25 ]  

황해도 금천(金天) 출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아버지는 형식(亨植)이다.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철원(鐵原)에서 의병들과 항일운동을 도모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강원도 대표로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조직화하였다. 또한 항일운동의 방법으로 조선인 관리들이 관직에서 퇴직하여 일제의 행정기관 운영을 마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조선인관리퇴직동맹(朝鮮人官吏退職同盟)을 추진하였다.

그해 8월 재정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철원에 조직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서무부장인 강대려(姜大呂)와 협의, 강원도단 단장 이봉하(李鳳夏), 외교부장 김철회(金喆會)·이용우(李用雨)·오세덕(吳世德), 재무부장 김완호(金完鎬) 등과 만나 강원도 각군에 군단(郡團)을 설치하는 책임을 맡았다.

대한독립애국단은 1919년 5월 신현구(申鉉九)가 상해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고 결성한 임시정부의 지원단체로서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인 조직 확대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때 그는 원주(原州)·횡성(橫城)·강릉(江陵)· 양양(襄陽)·금화(金化) 등지를 순회하며 강원도 각처에 대한독립애국단의 지단을 설치하는 한편, 조선인관리퇴직동맹 운동을 위한 자금모집에 나섰다. 그러나 1920년 1월 강원도단 조직이 발각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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