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금학산
2004/5/3(월)
이정환 칼럼 - 농업… 존재 이유와 구원의 조건[농민신문]  

이정환 칼럼 - 농업… 존재 이유와 구원의 조건


누군가 농업은 조강지처라 했다. 누구는 어미라고도 했다. 맞는 말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돼 외국에서 식량을 사온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 시절, 우리 논밭에서 거둔 곡식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자랐다. 보리밥 한숟갈도 아껴 학비를 대준 덕에 우리는 세계에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됐다.


그래서 이제 국민소득이 100배나 늘었다. 그때부터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 지금 농가의 6할을 차지하고 있다. 누가 이 조강지처의 거친 손을 탓하려 하는가? 누가 이 어미의 구릿빛 얼굴을 흉하다 하는가? 야속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노엽기도 하다. 그러나 현명한 조강지처와 어미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조강지처가 지은 밥이 더 맛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미가 지어준 된장찌개가 콧날이 시큰하도록 옛맛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른 누가 지어준 밥상보다 더 정갈해야 하지 않는가? 내가 지은 밥과 된장찌개는 과연 그렇게 맛있고 정갈한가? 어찌 예전에 먹던 보리밥과 된장찌개만 고집할 수 있겠는가? 입에 맞는 새 반찬에 때로는 상큼한 과일도 후식으로 먹게 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어찌 그뿐인가. 집안을 깨끗이 닦고 정리하여 저녁에 돌아온 남편이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집 안팎을 쓸고 건넌방을 치워 놓아 아들네 식구들이 즐겁게 하루를 묵고 갈 수 있게 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조강지처가 있어 남편이 편하고, 이런 어미가 있어 자식의 삶이 즐겁다. 이런 남편과 아들이 있어 조강지처와 어미는 행복하다. 이렇게 우리 소비자·도시민·기업인·농업인 모두가 오순도순 살 수는 없을까?


소비자와 도시민은 소득 1만달러 시대에 걸맞은 생활을 하고 싶어한다. 다양하고 청결하고 값싼 식품을 사시사철 먹고 싶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산과 들, 강과 바다를 즐기고 싶다.


이것은 소비자와 도시민의 당연한 욕구이다. 농업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우수하고 값싼 식품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와 깨끗하고 아름다운 농촌 공간에 대한 도시민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농업의 책무이고 존재의 이유이다.


그러한 책무를 수행하여야만 농업의 소득기회가 늘어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존재의 조건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구를 우리 농업만으로 충족시킬 수 없을 때 농업 스스로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 농업의 필요 때문에 그들의 욕구를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소비자와 도시민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농업과 농업인의 삶이 위협받아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와 도시민도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정부가 필요하다. 시장개방으로 농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농산물 가격이 하락한다면 농가의 소득을 보전해주어야 한다. 농촌 환경을 보전하기 위하여 농가의 이익이 유보되어야 한다면 그만큼 소득을 보상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소득 보전과 보상을 위한 재정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 재정소요는 도시민과 기업에서 나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농업의 필요 때문에 다른 산업의 이익을 포기하라고 하기보다 믿을 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고 농촌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보전하여 그들이 흔쾌히 그 부담을 수용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와 합의가 우리 모두를 구원할 것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 〈belmont@kre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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