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최종철 올림
2004/3/16(화)
Re..2편 친일파는 살아있다. 역사학자 이병도와 특무대장 김창룡 이야기  
우선 「고 김창룡 중장 묘갈」이라는 제목의 비명 전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1956년―저자주)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슲어 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함이 이구동성의 외침이었다. 그는 본시 영흥 출생으로 80년(1947년)에 육사를 마치고 그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장에 취임하여 이래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동난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명 전시 방첩의 특수 임무를 달성하였다. 84년(1951년) 육군특무부대장에 부임하여서는 더욱 헌신적 노력과 탁월한 지휘로써 국가 및 군사 안전 보장에 기여하였다. 그 중요한 적발만으로도 85년(1952년) 대통령 암살 음모의 김시현 사건 87년(1954년) 남도부 등의 대남 유격대 사건 88년(1955년)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한 그것이다. 그는 이렇듯 나라에 유공하였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의 생년은 단기 4253년(1920년) 11월 23일. 형년은 37세. 순직과 동시에 육군 중장에 승진되었다. 단기 4289년 2월 3일 입.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정일권. 1952년 5월 24일 발생한 총풍 사건의 원조 나는 비명의 마지막에 선명하게 음각된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이라는 문구를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병도가 지은 김창룡의 비명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 시절) 간첩 부역자 2만5천명을 검거 처단하는 임무를 달성했다"라거나 "(특무부대장 시절)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했다"는 등의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 처리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가 양산됐으며, 방첩활동 과정에서도 수많은 정치공작이 자행됐다는 사실이 하나둘 밝혀지고 있다. 이와 관련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2과에서 근무했던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의 증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는 2000년 1월, 대전형무소 학살사건을 공론화시킨 재미동포 이도영 박사와의 면담 과정에서 "(전쟁 당시 양민학살은) 전부 김창룡이 한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김창룡은 '총풍(銃風)의 원조(元祖)'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오제도 씨와 함께 왕년의 반공검사로 불렸던 선우종원 씨가 자신의 회고록 『격랑 80년』에서 생생하게 증언한 비사는 매우 흥미롭다. 1952년 5월 24일 피난 수도 부산에서 이른바 '범일동 무장공비 총격사건'이 발생했다. 신문은 "백주에 인민군 게릴라들이 부산 범일동 뒷산에 나타나 병참기지에 총격을 가해 미군과 몇몇 한국인 인부가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선우종원은 그 신문 기사를 보고 코웃음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장면 국무총리의 비서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부산·경남지역의 치안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채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의 정보와 판단을 기준으로 볼 때 무장공비 침투는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그건 조작이었으며, 조만간 계엄으로 몰고 간 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선거를 치르려는 음모"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바로 다음날인 5월 25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다(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월요일인 5월 26일 국회의원 수십 명을 태운 국회통근버스가 헌병사령부로 견인돼 가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행했다. 이승만의 재집권을 위해 헌법과 국회를 유린한 부산정치파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도 비슷한 성격의 '공작사건'이 있었다는 것이 선우종원의 증언이다. 그는 자신이 목격했던, 이 사건을 다뤘던 국무회의 분위기를 자신의 회고록에서 생생하게 전하고 있거니와, 그날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던 이 대통령은 총리와 장관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여러분, 김창룡 대령 알잖소. 여러분들, 김 대령을 자식처럼 사랑해 주세요. 그는 정말 애국자요. 그는 어제 지리산 공비들이 부산에 들어와 무기를 사 가지고 관에다 넣고는 상복까지 입고 상여처럼 메고 위장한 채 지리산으로 가는 걸 붙잡았소. 이 얼마나 애국자요." 곧이어 이 대통령은 조병옥 내무부 장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국무회의장으로 김창룡을 불러들였다. 선우종원은 회고록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들어온 무리들은 한 술 더 떠 국무회의실 바닥에 뭔가를 쭉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것을 본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빨갱이한테서 압수했다는 무기라는데 개머리판도 없고 낡아 저게 살상용으로 제대로 쓰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물건을 보는 이 박사의 입가에는 흐뭇한 웃음이 배어 있는 것을 어쩌랴." 그런데 1년 후에 이 '범어산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군법회의에 회부됐던 민간인들이 검찰청으로 넘어오면서 이 사건이 김창룡에 의해 조작된 연극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선우종원은 당시 조진만 법무부 장관이 총리에게 보고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는데, 조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난 계엄령 하에서 있었던 상여를 위장한 빨갱이 사건 말입니다. 그게 순 조작이었습니다. 사건이 검찰로 넘어와 다시 조사를 해보니, 김창룡 대령이 각하께 충성 경쟁을 하느라 일부러 꾸민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죄 없는 민간인들을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실증사학의 대부'가 '실증사학'을 배신하다니 이 '원조 총풍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수 있는 증언은 다른 곳에서도 이미 나왔다. 1951년 서창선 대위 살해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4·19 직후에야 석방된 서민호 전 의원(국회 부의장 역임)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증언을 한 바 있다. "나는 대구형무소에 있을 때 중형수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들 중 몇몇이 밖으로 불리어 나갔다가 오더니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내게 말하기를 자기들은 곧 부산에 가서 큰 일을 하게 되는데 그 일만 끝나면 석방이 될 것이라면서 의기양양한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시라 하더라도 사형수와 무기수들을 그렇게 석방해 줄 수 있는가 하고 많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얼마 후 그들은 과연 군용차에 태워져서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구형무소에서 나올 때까지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형수와 무기수들은 어디로 갔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지금은 고인이 된 서민호 전 의원이 남겨놓은 증언을 다시 들어보자. "그들은 대구형무소에서 부산 금정산으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공비로 위장하고 있다가 모조리 사살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내 변호사와 친지들이 대구형무소를 찾아와서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이유는 부산에 공비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면서 계엄령 선포의 구실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서민호 전 의원은 그러한 공작을 꾸민 장본인으로 김창룡을 지목했다. 당시 대구형무소를 열심히 들락거리던 김창룡을 여러 번 목격했다는 증언과 함께. 김창룡의 정치공작 중에서도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이다. 암살범 안두희는 세상을 뜨기 전인 1992년 "조선호텔 앞 대륙상사로 위장된 특무대 사무실에서 김창룡을 만나 백범 암살을 지시 받았다"고 증언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바 있다. 물론 안두희의 자백이 있기 훨씬 전부터 김창룡의 개입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황은 많았다. 실제로 백범이 저격당한 6월 26일 저녁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시켜 쉬게 한 것도, 종신형에서 15년으로 감형시키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준 것도 김창룡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반세기가 지난 뒤 또다시 발생했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1858∼1939)와 장남인 김인 선생(1918∼1945)이 아들과 부친의 암살 배후로 지목된 김창룡과 같은 묘지인 대전 현충원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독립운동에 앞장섰지만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하고 머나먼 이역에서 눈을 감은 두 사람이 묻혀 있는 애국지사 제2묘역과 김창룡이 묻혀 있는 장군묘역은 야산을 사이에 두고 불과 5백여 미터 떨어져 있다. 그런 김창룡을 위하여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 이병도가 비명을 지어준 것이다. 그리고 이병도가 지은 비명을 중심으로 김창룡과 관련된 현대사를 살펴보면 십중팔구 오류와 왜곡으로 점철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거니와, '실증사학의 대부'가 지어준 '반공투사의 업적'은 '민족정기'는 물론이고 '실증사학'마저 배신했던 것이다. 매국노 이완용의 관 뚜껑은 어디로 사라졌나 이병도와 김창룡 이야기를 『시민의신문』에 4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던 2003년 5월 나는 잇따라 두 건의 제보를 받았다. 그것은 질곡의 현대사와 영욕을 함께 했던 이병도와 김창룡이라는 두 인물의 '반면교사로서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언과 사료였다. 익명의 제보자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보내온 「육군 소장 김창룡에 대한 태극 무공훈장 수여의 건 품의」(1955년 작성된 정부 문서)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이병도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기로 한다. 나에게 제보를 한 주인공은 한 원로급 대학 교수였다. 내가 연재하고 있던 기사를 흥미롭게 보다가 전화를 걸었다는 그는 "실증사학의 대부로 알려진 이병도 박사가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의 조카 손자라는 사실을 아느냐"고 물은 뒤 다음과 같은 사연을 알려 주었다. "해방 직후 전북 익산 백성들이 이완용의 묘지를 파헤치고 관을 끄집어내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불에 타다만 이완용 관 뚜껑을 보관하고 있던 한 주민이 이것을 원광대 박물관에 기증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병도 박사가 원광대를 찾아가 그 관 뚜껑을 역사 연구에 쓰겠다고 설득해서 가져간 뒤 개인적으로 없애버렸다고 한다. 믿을만한 역사학계 인사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인데,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기 바란다." 충격적인 내용의 제보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할아버지의 실증사학 얘기는 역사를 올바르게 보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이건무 박물관장의 해명은 설자리를 잃게 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몇 번이나 강조한 대로 이병도는 실증사학의 대부로 알려진 역사학자다. 실증(實證)할 수 없다면 정사(正史)로 기록하지 말라는 사관(史觀)에 입각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BC 8세기 전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학설을 주창했다. 물론 그런 주장은 일제시대 식민사관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으면서 수립된 측면이 강하다. 그런데 그렇게도 실증사학을 강조했던 그가 정작 '가문의 수치'를 우려해 공사(公私)도 구분하지 못한 채 할아버지 뻘인 이완용의 관 뚜껑이라는 역사 유물을 태워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제보의 사실 여부를 추적하던 중 누군가로부터 10여 년 전 『시사저널』에서 그런 기록을 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마침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는 『시사저널』 1992년 8월 27일자 기사(정희상 기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잃어버린 과거의 권세와 민족의 손가락질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모른다. 지난 1979년 이완용의 증손 이석형 씨는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에 묻혀 있던 이완용과 이항구 부부의 묘를 직접 파헤쳐 화장시켜 버렸다.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붉은 페인트로 일본 정부가 부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위대훈위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院 副議長 二位大勳位 牛峯李公之柩)'라 씌어 있었다. 이완용 부부의 관 뚜껑은 주민이 가져갔다가 원광대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광대에는 이 관 뚜껑이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원광대 박물관장이었던 박순호 교수는 "소장 직후 이완용의 친척 되는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내려와 총장님을 설득해 관 뚜껑을 가져가 태워버렸다"고 밝혔다. 애초의 제보 내용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역사학자 이병도가 쓰고 있던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는 결정타가 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가문의 수치' 숨기느라 역사 유물 불태운 실증사학자 한편 이완용과 관련된 역사 자료를 추적하던 중 나는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기록을 발견했다. 우봉 이씨 시조(始祖)인 이공정(李公靖)의 23대손인 이완용이 일제로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의 직책과 후작 작위를 받으면서 '잘 나가던' 시절에 '가문의 영광'을 위해 시조의 묘지를 찾아내 대대적으로 개축한 사실이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 내용은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을 지낸 윤덕한의 역작 『이완용 평전』(중심)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일당기사』(이완용 사망 다음 해인 1927년 그의 조카이자 비서인 김명수가 엮은 책, 일당은 이완용의 호)에 의하면 이공정의 분묘는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 전에 없어져 우봉 이씨 가문에서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완용이 죽기 1년 전인 1925년 5월경 황해도 장단군 소남면 지금리 서원동에 사는 문창업이라는 사람이 장단군 소남면 유덕리 마답동에서 이공정 묘의 지석을 발견해 이완용에게 들고 왔다. 이완용은 사실 우봉 이씨가 생긴 이래 그 집안에서 배출된 수많은 인재 가운데서도 가장 출세한 인물이었다. 비록 매국노라는 손가락질은 받고 있었지만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을 3년 이상 지냈고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으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 시조의 묘 지석을 우연히 발견한 시골 촌부가 그것을 들고 이완용을 찾아온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지석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출생 및 사망 일자, 행적, 무덤의 모양과 방향 등을 기록해 무덤 앞에 묻어둔 판석을 말한다. 이완용은 이 지석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6월 5일 우봉 이씨 종친 몇 명을 데리고 현장에 가서 직접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이 지석이 이공정 분묘에서 나온 것임을 확신하고 이 사실을 전국의 모든 우봉 이씨 종친에게 통보한다. 이어 6월 28일 자신의 옥인동 저택에서 종친회의를 열어 이공정의 분묘를 개축하고 석물을 설치하기로 최종 결정한다. ……결국 잃어버렸던 우봉 이씨 시조의 묘를 23대손인 매국노 이완용이 찾아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도하게 된다. 할아버지(이완용)는 '가문의 영광'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쌓은 재물과 권력을 동원해 조상의 분묘를 화려하게 개축했지만, 손자(이병도)는 '가문의 수치'가 널리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부끄러운 조상의 분묘에서 나온 관 뚜껑을 없애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할아버지(이병도)는 일제가 역사왜곡을 위해 급조한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한 전력을 가지고 있건만, 손자(이건무)는 할아버지가 창씨개명을 안 했으니 친일 논쟁은 부당하다고 강변하고 있다. 정녕 오욕과 왜곡의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정지환 기자 ssal@ngotimes.net ※ 주제에 맞지 않거나 욕설, 비방이 담긴 글은 임의로 삭제할 수 있습니다. 시민 [2004-01-28] 와우! 기사가 무진장 기네여.... 박스로 좀 잘라서 편집해 주면 좋으련만... 삭제 시민케인 [2004-01-28] 피디수첩 게시판에 실린 글을 보고 들어와서 봤습니다. 기사기 무진장 길긴 했지만 친일파 문제의 본질을 알기 쉽게 설명해준 기사였습니다. 좋은 기사 감사 드립니다. 삭제 chstkfka [2004-02-02] 오우-굳!! 역사는 살아잇다나 -어쩐다나....그러네요.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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