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강원일보 2003/11/13(목) | |
이강훈 선생 100년 삶 ◇이강훈옹 연보 -1903년 6월13일 강원도 김화에서 태어나다.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만세시위 참가, 그 이듬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다. -1924년 북간도 사범학교 졸업. -1926년 김좌진의 지시로 백두산 근방의 신창학교 교사로 후진양성에 전념. -1929년 한족총연합회 가입, 동북만에서 활약한데 이어 해림에서 북만민립중학기성회를 개최해 집행위원이 돼 민립중학 설립, 교포 청소년들에게 조국광복을 위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다. -1932년 대련을 거쳐 상해로 망명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담해 활약. -1933년 3월17일 일본 주중공사 아리요시를 암살하기 위해 6·3정 부근에 대기하고 있었으나 계획이 사전에 노출돼 일본경찰에 체포 그해 11월24일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다. -1940년 징역 8년11월7일로 감형. -1942년 형이 종료됐으나 일제는 그의 민족의식이 극히 농후하다고 판단해 그해 7월18일 소위 예방구금 판결이란 편법을 통해 동경 교외에 있는 부중감옥에 수감. -1945년 10월10일 조국 광복으로 출옥. -1945년 이후 일본에서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을 맡아 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유해봉환 주선. -1960년 귀국후 한국사회당에서 정치활동. -1961년 백범김구선생지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군사쿠데타 이후 민주화 활동으로 체포돼 3년동안 옥고를 치르고 도일. -1967년 재귀국해 79년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조사실장, 연구실장, 편찬실장 등을 역임하며 10권에 달하는 `독립운동사'와 20권이 넘는 `독립운동사 사료집'을 편찬·간행.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 -1983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장. -1988년 92년까지 10,11대 광복회장 역임. -1992년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원회 회장. ◇이강훈옹은 누구인가 `이 시대에 남아 있는 마지막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金九)선생에 비견되는 강원이 낳은 항일전사' 이 표현은 독립운동의 거목인 청뇌(靑雷) 이강훈(李康勳)옹을 일컬었던 표현이다. 이옹이 우리 독립 운동사에서 종종 金九선생에 비견되는 것은 행동하는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봉건시대는 저물고 20세기가 시작되던 1903년 철원군 김화에서 태어난 이옹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17세의 어린 나이로 고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이듬해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이옹은 1920년 18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한 이래 상해 북간도를 거쳐 신민부에 속했던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이후 독립운동가 양성을 위한 신창학교 교사(1926), 한족총연합회 활동, 민립중학 설립(1929), 남화한인청년연맹 가담(1930) 등이 이옹의 주요 중국활동 기록이다. 무엇보다 이옹을 일본이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은 1933년 아리요시 주중(駐中)공사 살해미수 건에서 비롯됐다. 일제 군벌의 음모를 실현하기 위해 상해에 부임한 아리요시(유길명)공사를 처단하기 위해 이옹은 백범선생이 제공한 도시락형 폭탄을 휴대하고 거사현장에 도착했으나 안내인의 어설픈 행동으로 인해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해 7월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로 압송돼 15년형을 언도받았다. 같이 의거를 도모했던 백정기 의사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2년 특사라는 제도에 의해 형기가 단축된 이옹이 출옥을 앞두자 일본정부는 출옥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갈 뜻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이옹을 무기한 예방구금에 처했다. 패망을 목전에 둔 일본 정부는 이옹이 한반도의 호랑이가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결국 이옹은 일본이 패망한 후에야 출옥할 수 있었다. 그때 나이 43세. 20대는 만주와 시베리아의 눈보라 속에서, 30대는 일본의 어두운 감옥안에서 보내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이옹은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주도,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심사위원, 대한민국 광복회 회장,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백범 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등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을 이끌었다. 1988년부터 5년 간 제10대, 제11대 광복회 회장을 역임했다. 정부는 이같은 이옹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지난 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특히 이옹은 국내 독립운동사 연구의 거목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외독립운동사' `항일독립운동사' `무장독립운동사' `대한민국임시정부사'를 집필 간행했고, `독립운동사 대사전'도 발간해 국내 학계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을 받았다. 2000년 5월 대장암 진단을 받고 서울 보훈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던 이옹은 고령에다 투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청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도 지난 2001년 강원일보 기자의 방문에 서면 인터뷰를 하는 등 고향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고 이 과정에서 1933년 일본공사를 살해하려고 한 당시상황에 대한 육필기록도 남겼다. 이 육필기록은 임종 직전에 남긴 유일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회의원을 지낸 박영록(朴永祿)전강원도지사는 이옹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이 많고 실천이 부족하지만 이옹은 반대로 말이 적고 실천을 많이 했던 분”이라며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다”고 회고했다. <崔秀永기자·sychoi@kw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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