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주간조선
2006/6/3(토)
109년 전 '여우사냥'의 교훈 - 2004. 3. 4  
[1793] 편집장 레터
[주간조선 2004-03-04 14:32]
광고
109년 전 ‘여우사냥’의 교훈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30분. ‘여명의 경복궁’.칼을 뽑아 든 20여명의 괴한들이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궁의 북쪽 뒤편,건청궁 옥호루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한 여인을 향해 번개처럼 칼을 휘둘렀다. 한 번, 두 번…, 난자했다. 여인은 유혈이 낭자한 채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이 날의 작전명은 ‘여우사냥’. 죽임을 당한 여인은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작전에 동원된 20여명의 괴한은 일본자객이었다.
국모(國母) 시해에 쓰인 1m 길이의 일본도는 17세기 초, 에도시대의 도검 장인 다다요시가 제작한 것으로 지금 일본 후쿠오카의 구시다 신사에‘모셔져’ 있다.
‘일순전광자노호(一巡電光刺老狐)’.“한순간에 번개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여우사냥’에 참여했던 후쿠오카 출신 사무라이 자객, 도 가쓰아키. 시해를 주도한 미우라 일본 공사의 ‘개인비서’였던 그가 나중에 칼집에 남긴 문구이다.
명성황후의 가슴에 칼을 꽂았던 도. 그는 “민비를 베는 순간 마주쳤던 눈, 그 눈길을 잊을 수가 없다”며 13년여 동안 번뇌하다 이후 명성황후의 영혼을 기리고, 스스로의 행동에 참회하는 불상을 바쳤으며 “이 세상에 다시 나와선 안된다”며 이 칼을 신사에 맡겼다.
지난해 간행된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란 책이 전하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슬픈 단면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런 것인가. 100여년 전 처참했던 그 새벽의 ‘비밀의 단서’를 자객 도가 남긴 것은…. 이후 500년 조선왕조의 몰락과 일본의 조선 강점은 물밀듯이 진행되고, 10년 후 을사보호조약, 15년 후 경술국치로 이어진다.
한 발 더 들어가보자. 여우사냥에 동원된 도 등 자객들은 일본 우익단체의 원조격인
‘현양사(玄洋社)’의 비밀결사조직인 ‘흑룡회(黑龍會)’ 소속이다.
일본 재야의 막후 실력자 도야마 미쓰루(頭山滿)가 1881년 결성해 일본의 정치ㆍ외교정책을 배후 조정하고 대륙침략의 선봉역을 담당,‘대륙낭인’으로 알려진 이들은 만주 흑룡강에서 조직명을 따올 정도로 일본 대륙지배의 꿈을 제1의 모토로 했던 조직이다.
이십수 년 전 대학시절. 대원들이 현지인으로 변장해 조선반도ㆍ만주ㆍ블라디보스토크를 휘젓고 다니며, 목숨을 걸고 영토 강점과 전쟁을 위한 ‘정보 수집전’에 나선 흑룡회의 전말을 기록한 ‘일본제국주의의 한 연구(한상일 저)’란 책을 읽으며 충격 속에 밤을 하얗게 새운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 그때 우린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주간조선이 지난호와 이번 1793호 등 두 번에 걸쳐 내보낸 ‘일제, 백두산 천지에 쇠말뚝을 박다’ ‘일제, 조선의 꽃을 짓밟다’ 사진 특집은 국민들 사이에 ‘100년 전 그 망국의 시절’을 염려하는 위기의식이 퍼져나가는 데 대한 경고성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7년 간 사재를 털어 17개국을 돌며 한말과 일제하의 사진 1만여점과 당시 물건 등 1만5000여점의 생생한 ‘역사 기록물’을 모아온 우리들의 영웅 ‘홍사광’ ‘정성길’. “아픈 역사도 역사이다.” “구호와 머리띠로 일제에 항의하는 시대는 지났다. 우리는 그때의 아픈 상처를 오늘의 삶 속에서 되새기기 위해 역사적 사진기록물을 모았다.” 이들 기록사진을 정리해 ‘평화의 공원’을 만드는 것이 꿈인 두 사람이 우리에게 던지는 말이다.
2003년 6월 일본 의회에서는 전쟁대비법인 ‘유사(有事)법제’가 통과됐다.
그리고 올해 일본은 우리의 ‘독도우표’ 발행에 공개시비를 거는 등 독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문제를 제기했다.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 프로젝트를 내세워 우리 민족사인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중국의 움직임이 노골화한 지도 수 년째다.
일제의 백두산 천지 쇠말뚝 사진이 던져주는 “너희들 정신차려라!”라는 진한 경고음을 깊게 되새겨야 할 때이다.

김민배 주간조선 편집장(baibai@chosun.com)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간조선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이름   메일
  내용 입력창 크게
                    답변/관련 쓰기 폼메일 발송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