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이태경 기자]항우(項羽)의 실패에서 배우자
많은 사람들이 초한지를 읽어 보았을 것이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쥐기 위해 벌이는 사투를 중심축으로 하는 이 이야기는 그 규모의 웅장함과 극적 요소로 인하여 허다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라는 말이 항우에게서 유래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항우는 그 용맹이나 지략면에서 천하에 대적할 상대가 없는 호걸이었다. 또한 그에게는 범증(范增)이라는 일급의 참모와 용맹하기 이를데 없는 많은 장수들이 있었고, 누구도 넘보기 힘든 대군(大軍)을 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이러한 외적인 조건만을 놓고 본다면 진나라 멸망 이후 항우가 천하의 패자로 군림할 것이 당연해 보였지만 항우는 유방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젊은 나이에 자살하고 만다. 전력이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항우가 유방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원인에 대해서는 후세의 사가들이 다양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 원인들을 보면 부하들에 대한 논공행상에 인색했다는 점,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했다는 점 등이 꼽힌다. 특기할 점은 항우가 패전한 원인 가운데 양도(糧道)확보에 실패한 점을 주요한 원인으로 분석하는 사가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원활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적인 병참선의 확보와 군수품의 보급이 필수적이다. 항우와 유방이 쟁패하던 시절에는 보급품 수송의 방법이 지금보다 훨씬 제한적이었던 만큼 육로를 통한 병참선의 확보는 가히 사활이 걸린 일이었을 것이다.
유방이 항우와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재기할 수 있었던 까닭은 곡창지대인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두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식량을 군량미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량미가 있는 한 군사를 모집하기란 난세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항우의 보급선은 끊임없이 팽월에게 공략당하여 보급이 두절되기 일쑤였다. 배고픈 병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탈영병이 속출하는 것은 정한 이치일 것이고 이런 병사들을 데리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불행히도 항우는 보급과 병참의 중요성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지 못한 채 쓸쓸히 역사의 패자(敗者)로 기록된 것이다.
유방이 곡창지대인 헝양(衡陽)과 성고(成皐)에서 농성하고 빠져나가기를 거듭할 때 항우의 모사(謀士)였던 범증은 항우에게 간곡히 충고한다. 유방을 직접 잡을 생각을 하지 말고 형양성과 성고성을 봉쇄하여 유방의 군대를 굶겨 죽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항우는 범증의 충언을 무시하고 유방을 직접 잡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 결과는 유방의 승리와 한(漢)제국의 성립이었다. 항우가 튼실한 병참기지와 안정적인 보급선의 중요성을 간파하였더라면 역사에 등장한 것은 한제국이 아니라 초(楚)제국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수들은 경제개혁을 가장 두려워한다
국보법 폐지와 관련한 논쟁으로 정국이 혼미한 지금 뜬금없이 무슨 항우와 유방의 고사(故事)를 꺼내느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들뜬 가슴을 진정시키고 냉정히 생각해보면 유방의 성공과 항우의 실패는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항우와 유방의 쟁패에서 승부를 가른 주요한 원인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튼실한 병참기지와 안정적인 보급선의 확보 유무였으며 이러한 원리는 비단 전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할 것이다.
국보법이 폐지되면 마치 나라가 결딴날 것처럼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는 극우보수진영과 국보법 폐지를 위해 총력을 경주하고 있는 진보진영을 보고 있노라면, 국보법의 존폐여부가 한국사회의 질적 발전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인 듯이 느껴진다.
물론 국보법은 법 제정 이후 자행된 무수한 인권유린의 사례에 비추어 보아도 그렇고 법률의 모호성·자의성 등의 이유로도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대체입법이나 형법보완 등의 논의는 국보법 폐지의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므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작금에 논의되고 있는 국보법 개폐논란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데 그 한계가 있다. 사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보법 개폐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샐러리맨들과 서민들은 오르는 집값과 줄어드는 일자리를 걱정하고 아이들의 사교육비 마련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고금을 막론하고 서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먹고사는 일의 해결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자칭 보수주의자들-기실은 수구주의자들-도 먹고사는 일에 절대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단지 먹고산다는 일의 수준과 층위가 서민들과 질적으로 차별화될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부를 어떻게 하면 더 불리고 자식들에게 물려줄까 하는데에 온 신경을 쏟고 있다.
따라서 한나라당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한국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이 수호하려는 것은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 국가안보나 자유민주주의가 결코 아니다.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엄청난 부와 권력이다.
이제는 스스로도 국보법이 국가안보와는 별 상관이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국보법 폐지에 경기(驚氣)를 일으키는 이유는 국보법 폐지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부와 권력의 몰락을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국보법 폐지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자! 여전히 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의 출발이며 토대인 경제부문에 대한 근본적이고 철저한 개혁이다. 이데올로기 투쟁도 중요하고 ‘역사바로세우기’도 중요하다. 언론개혁도 긴요하고 교육개혁도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이런 싸움에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경제개혁에 실패하면 한국사회의 총체적 개혁은 무산되기 쉽다. 이는 마치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패하는 격이다. 따라서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개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한국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국보법 폐지가 아니다. 근본적이고 총제적인 경제개혁을 통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게 되고 부동산 등을 통한 불로소득이 근절되는 것을 보수주의자들은 가장 두려워한다.
다시 한 번 항우와 유방의 고사를 언급하고 마무리하겠다. 유방이 거듭된 패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재기하여 결국에는 천하의 패자가 된 까닭은 무엇보다 양호한 병참기지와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대한 군량과 넉넉한 예비병력이 있는 한 설사 전투에서 여러 번 패배한다 해도 결국 전쟁에서는 승리하게 마련이다. 유방이 가지고 있었던 병참기지와 보급로는 정확히 물적토대와 조응한다.
같은 이치로 한국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이 막대한 부를 계속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은 끊임없이 이데올로기 싸움을 벌일 것이고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더라도 종국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참여정부와 여당은 이처럼 자명한 원리를 깨달아 국보법 폐지와 경제개혁을 병행해서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태경 기자
덧붙이는 글
대자보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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