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최종철
2003/10/15(수)
1592년 6월 19일 남대천(이우형의 한탄강 이야기)  

◎ 이름:이우형 (hantanet@hanmail.net)
◎ 2003/10/8(수) 15:41 (MSIE6.0) 211.184.90.193 1024x768

 1592년 6월 19일 남대천  


연재 - 이우형의 한탄강 이야기(15)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전환기적 사고의 모든 거대 담론은 DMZ 속에 녹아 있다. 그러나 군복으로
갈아입고 완전군장의 호위 속에 굳센 철책 통문을 열고 그 기형의 공간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회
색 빛으로 이성을 진공상태처럼 꽁꽁 냉각시키는 그곳은 모든 것을 진하게 마비시킨다.

전쟁은 침묵의 고요로 정지된 채 박제되어 있고, 평화 또한 왜곡된 사치임이 이곳에 들어오면 싸
늘하게 한 걸음의 보폭에 사유의 불규칙하고 혼란한 심리적 파장을 숨가쁘게 일으킨다.

이러한 우리 국토의 어긋난 인위적 공간의 많은 부분을 한탕강은 자연의 모습으로 쉬지 않고 흐른
다.

북에서 휴전선을 지나 남으로 흐르는 본류는 철원군 갈말읍정연리의 당꾸미에서 자기보다 작지
만 더 큰 시련의 주름살과 굵직한 사연이 드리워진 철원군 김화의 남대천(南大川)과 아우러진다.

두 물은 DMZ가 배태한 거대한 혼돈을 용해해 당꾸미에서 하나의 태극이 되고 핵이 되어 현무암
절벽을 상승해 올라와 그 넓은 철원평야를 고루 적시며 긴장이 이완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또 다른 분단의 하천인 남대천 또한 한탄강물이 되어 한강과 합류하고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1592년 6월 19일 남대천
북한의 오성산(五聖山, 1061,7m) 정상에서 발원하는 남대천은 한탄강에 합류하는 당꾸미 아우라
지까지 50km 길이의 유로를 가진 풍부한 수량의 하천이다.

삼국시대와 조선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옛 관아가 위치한 도회지의 앞을 흐르는 강이나 하천을
남대천으로 불러왔던 우리의 하천 이름이 보편적으로 쓰여 왔던 것처럼, 철원의 남대천 또한 그
보편적 사유의 범주에 그 명칭의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김화현이라는 고을의 중심이 이 하천
의 품안에 안겨 있었던 까닭이며 또한 화강(花江)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웠던 하천이다.

휴전선 남쪽이 약 27km, 북한지역이 23km 거리인 이 하천 가운데 북쪽 지역을 관망하려면 603m
높이의 계웅산(鷄雄山) O.P가 제격이다. 이곳에서는 위엄스러운 오성산을 중심에 두고 저멀리 북
한의 평강시가지와 금강산의 비로봉 정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남대천은 오성산의 북동쪽을 감싸 흐르다 북한의 가현리에 다다라 서남으로 흐름을 바꿔 근북면
의 하소리를 지나 휴전선을 벋어날 때까지 사행성의 부드러운 유로를 형성한다.

북한 지역의 남대천은 하소리의 갈동(葛洞)에 충철과 비운의 역사를 묻어두고 있다. 그 역사의 무
대에 주인공은 원호(元豪,1533~1592)이다.

선조 25년에 발발한 7년 전쟁인 임진왜란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전란이 비켜가지 않은 지역
인 김화에 갈동전투라는 또 하나의 시련의 상처를 남긴다.

임란 개전 초에 남한강 지역인 구미포와 마탄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여주목사 겸 강원방어사 원
호는 강원감사 유영길의 격문에 의해 1592년 6월 초 강원도의 김화로 진격한다. 당시 김화에는 임
란당시 가장 많은 문화약탈과 만행을 자행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조카인 23세의 시마즈
다다도요(島津忠豊)가 휘하 500여 병력으로 김화에 주둔하고 있었다.

500여 병력으로 김화에 당도한 원호군은 안개가 짖게 깔린 6월 9일 새벽, 정보와 정황을 사전에 탐
지하고 남대천변 갈동에 매복하고 있던 시마즈 군대의 급습을 맞고 허를 찔린다.

일대 혼란을 맞은 원호군은 조총을 앞세운 우수한 화력으로 조직적으로 좁혀오는 적의 포위망에
맞서 전열을 정비하려 하였지만 전세는 이미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이렇게 한 낮이 되도록 이어진 갈동의 혈전은 부근의 350고지와 남대천을 피로 물들이면서 아깝게
도 조선군의 참패로 끝이 난다.

마지막까지 선전하며 군사를 독려했던 원호 역시 20여개의 화살이 몸에 박힌 채 500의 군졸과 함
께 61세의 나이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원호의 김화 갈동전투는 많은 자료들에 그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여주 북내면 장암리에 있는 그
의 묘에는 이곳에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그의 비문이 잘 전해주고 있다. 또한 원호가
순절한 그 장소에는 효종 7년에 그의 시호를 따 충장사(忠壯祠)를 세워 그의 충혼과 넋을 기리는
성소가 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더 분개할 일은 일제강점기 말에 일어난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치되었던 이 충장
사가 어찌된 일인지 소리 소문 없이 헐려 나간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충장사는 일제의 눈에는 가시였으리라. 물론 전국적으로 행해졌던 그들의 문화말살정책이 이곳이
라고 예외일 수 없는 이유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충장사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텅 빈 공간으로 남게 되고 그나마 지금은 북한 지역에 속해 확인할 길조차 없다.

비무장지대 너머의 갈동은 북한 지역의 남대천과 함께 최근에 완공된 승리전망대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 410년전 여름, 안개 자욱한 그 운명의 격전장에서 스러져간 500의 조선군과 조방장 원
호.....

6·25로 인해 더 많은 젊음들이 시련 많은 땅인 김화의 남대천에서 이념의 소용돌이에 희생되어 사
라져 간 그곳엔 지금 초여름의 초목만이 무성할 뿐이다.

남대천이 남한으로 유입되는 암정리의 수문 앞에서 다 사그러져만 가며 퇴물이 되어버린 옛 현수
교의 녹슬어버린 사연을 담고 담아 초여름의 남대천은 인고와 비운의 사연을 담아 소리없이 흐른
다.

암정리에서 산 너머로 보이는 하소리의 능선을 바라보며 아비규환이었던 1592년의 6월과 지금의
적막한 이 초여름을 대비해보며 맑디맑은 남대천의 물과도 같은 또 다른 그 무언가의 근원적이며
조용한 잉태를 기대해 본다.





독립군: 김화지역 정통성 회복의 좋은 자료이군요//  -[10/15-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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