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33
2005/4/5(화)
상허 이태준과 임정첩보 36호 백산 안희제님과의 관계[펌]  

임정첩보 36호 안희제  |  正午의 엣세이 2004/12/19 12:58  


백산 안희제라는 인물이 있었다. 1909년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결성한 바 있고, 1914년에는 백산상회를 세우기도 했다.

후에 백산상회는 영남의 지주 1백72명이 참여한 주식회사로 확대되는데, 겉으로 보자면 건어물을 파는 사업체에 불과했으나 기실 만주의 항일무장단체와 상해의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하는 데 건립 목적이 있었다. 또한, 영남의 어린 인재들을 독일, 영국, 일본 등지로 유학보내기도 했다.

백산상회의 지점연락사무소는 대구, 서울, 원산, 만주 지역의 안둥[安東], 펑텐[奉天] 등지에 있었다. ‘臨政諜報 36호’였던 백산이 국내외 첩보 활동에 적극 개입했음은 물론이다. 1927년 활동 내용이 드러나서 백산상회는 문을 닫게 됐고, 이후 백산이 간여한 사업은 언론이다. ‘중외일보’ 사장으로 취임했던 것이다. 1933년경 그는 금광 사업에 성공해 모은 돈으로 만주로 건너가 ‘발해농장’을 세우기도 했다. 발해농장이 이민 간 우리 농민들의 보금자리가 됐음은 물론, 독립군과 교섭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백산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하는 까닭은 이태준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원산에서 유리걸식하던 이태준이 2년 동안 사환으로 몸을 맡겼던 곳은 백산상회 원산 지점 ‘물산객주 김상훈’의 집이었다. 동맹휴학 주도로 휘문고보에서 쫓겨난 이태준은 일본으로 건너갈 때도 백산상회의 도움을 받는다. 불온분자로 낙인 찍혀 도항증을 발급받지 못했던 그가 백산상회로 찾아갔고, 백상상회에서는 그에게 유학길을 열어 줬다.

이태준이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문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사실이야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태준이 입사할 당시 ‘조선중앙일보’는 전신인 ‘중외일보’였다. 그러니까 사장이 백산이었다는 말이다. 자, 그렇다면 보자. ‘영월영감’의 모델은 백산과 아주 무관하겠는가. 영월영감의 전면에 배치된 강렬한 민족의식은 그냥 무시해도 상관없는 치장에 불과하겠는가.


독립운동에는 돈이 든다. 백산에게는 모래알로 쌀을 만들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 능력이 없었다. 그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김예림처럼 “금전의 논리에 의해 희생당하는 존재”라 비판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의문이다. 김예림이 강조하는 복잡성은 내가 갖는 의문을 해명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작가의 “정치적 무의식”을 분석하는 데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구체적 사실을 통해 그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구체적 사실 밖에서 길어오는 “정치적 무의식”이란 아른한 봄날 그림자와 희롱하는 어린 아이의 장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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