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경향신문
2005/4/5(화)
[독립운동 자금책] 백산 안희제 - 부산  

 

[다시쓰는 독립운동 列傳] Ⅴ-1. 독립운동 자금책 백산 안희제

[경향신문 2005-03-28 20:30]    


독립운동은 무장투쟁, 의혈투쟁, 독립전쟁, 교육운동, 독립외교 등 여러 갈래로 나뉜다. 이 모든 독립운동을 가능케 한 것은 ‘자금’이었다. 독립운동자금은 ‘혈액’의 역할을 하며 독립운동을 지속시켰다. 독립운동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독립운동자금 조달은 그 자체로 목숨을 건 독립운동이기도 했다.

독립운동자금 조달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백산(白山) 안희제(1885~1943)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자금책이었던 그는 민족자본 육성뿐 아니라 교육구국운동과 항일언론투쟁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기도 하다.

◇독립운동자금의 젖줄=부산 중구 동광동 3가 10의 2. 이곳에는 백산 안희제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백산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안희제가 1914년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설립한 백산상회가 있던 바로 그 자리다.

1885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안희제는 1911년 러시아 망명 등을 거쳐 1914년 귀국한다. 망명 중 독립운동가들과의 만남에서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백산상회는 겉으로는 해산물·농산물을 취급하는 무역상이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이기도 했다. 또한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중국 대륙 등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연결하는 국내 거점이었다. 안희제는 국내에는 서울·대구·원산 등 18개소, 중국에는 안동·봉천·길림 등 3개소에 백산상회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만들어 임정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냈다.

안희제가 임정에 어느 정도의 자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제 치하 독립운동자금을 주고받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로 자금조달 자체가 극비리에 진행됐기 때문이다. 다만 안희제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들이 구술로 전해지고 있다.

안희제는 임정 첩보 36호의 총책으로 임정 운영자금의 60%를 조달했다고 한다. 안희제는 백산상회가 벌어들인 거의 모든 돈을 임정에 보내, 상회는 항상 적자 상태였다. 국내 갑부나 주요 기업가들을 찾아다니며 모금한 돈을 임정으로 전달하는 일도 도맡았다.

안희제가 경주 갑부 최준 집에 강도 복면을 하고 들어가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한 일화는 유명하다. 최준에게 여러 차례 헌금을 받아 면목이 없고, 거절당할까 두려워 강도로 위장했으나 결국 안희제 본인임을 밝힌 뒤 약속어음을 받아나갔다.

 당시 최준은 백산을 통한 헌금의 반이라도 임정에 전달되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해방 뒤 김구와의 만남에서 안희제에게 전달한 돈과 김구가 받은 돈이 일치한 것에 감격, 안희제의 무덤을 향해 대성통곡했다고 전해진다.

백범 김구가 안희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곡했으며 해방 뒤 조국으로 돌아와 안희제의 유가족 안부부터 물었다는 점에서 자금책 안희제의 역할을 가늠할 수 있다.

신한청년단원이었던 장덕수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안희제는 1919년 2월 파리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 파견된 김규식 일행의 여비 일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창원대 이귀원 강사는 “무장투쟁을 하려면 무기가 필요하고, 독립외교활동을 하려면 여비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자금이 없었다면 독립운동은 애당초 불가능했다”며 “안희제의 백산상회는 자금지원뿐 아니라 중국, 일본, 미국 등지에서 고립분산돼 있던 독립운동을 이어주는 연락거점의 역할을 하며 당시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다양한 독립운동=안희제의 활동이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동언 연구원은 안희제의 활동을 ▲교육구국운동 ▲학회활동 ▲비밀결사단체 활동 ▲민족산업 육성 ▲항일언론투쟁 등으로 분류했다.

안희제는 1907년 구명학교·의신학교를 세우고 1908년에는 창남학교를 설립했다. 1919년에는 장학재단인 기미육영회, 1921년 부산예월회 등을 만드는 등 민족교육 활동을 펼쳤다. 민중계몽과 일제의 일선동화 정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25년에는 ‘중외일보’를 인수, ‘중앙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사장에 취임해 항일언론투쟁을 펴기도 했다.

안희제는 또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의 주요 인물이었다. 안희제는 대종교를 통해 민족 결속과 독립을 실현하려 했다. 1931년 그가 만주에 꾸린 발해농장은 대종교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만든 독립운동 기지였다.

안희제는 대종교 활동으로 1942년 11월 일경에 체포돼 9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1943년 8월 빈사 상태에서 풀려나 곧바로 숨졌다.

〈김종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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